2013년 1월 10일 목요일

웅진시대(代) 백제(济)와 중원왕조(中原王朝)의 관계:

서기 475 년에 고구려(高句丽)는 백제(济)의 도성(都城) 한산성(山城)을 파괴시키고 백제(济) 개로왕(王) 여경(庆)을 살해하고 남여 8 천 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한산성(山城)은 무참하게 파괴되어 항폐되었으므로 도성으로 복건할 수 없었다.
백제(济) 문주왕(文周王)이 계위(位) 한 후 그 다음해 10 에 웅진(熊津 : 현재 韩国 南道 公州)로 도읍을 천도하여 백제(济)의 웅진(熊津) 시대가 시작되었다.
웅진시대(熊津代) 초기(初期)에 백제(济)의 국력(力)은 공허(虚) 상태였으며 권신(臣)들이 정치(治)를 조종하였기 때문에 국내통치(国内统治)에 혼란이 생겼으나 다행히 고구려(高句丽)와 전쟁은 없었다.

그리하여 백제(济)는 한 숨을 쉴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동성왕(城王 모대(牟大) 때 권신(臣)들을 타파하고 국내(国内) 정치(政治) 국면(局面)은 온정 상태를 유지해 가며 국력(力)을 부강하게 하였다.

동성왕(城王) 모대(牟大)와 무녕왕(武宁王) 여융(余隆) 양대(代)에 걸쳐 백제(百濟)는 중흥(兴)되었고 국세(国势)는 점점 강성해 졌다.

또 한편 신라(罗)와 고구려(高句丽)일본과도 우호(友好) 관계를 유지하였다.|


웅진시대 백제(济)와 남제(齐)와 소양(梁)의 관계:

서기 476 년 백제(济)가 웅진(熊津)으로 천도 한 후 유송(宋)에 조공(贡)을 바쳤다.

3 년 후인 서기 479 년에 유송 내의 황족들 간에 혼전이 발생했으며 대권은 소도성(蕭道成)에게 넘어 갔다.

소도성(蕭道成)은 유송(宋)의 제 8 대왕 순제(順帝 : 劉准)을를 폐위 시키고 국호를 제(齐)라고 칭하고 초대 왕에 군림하였다. 사가들은 제()를 남제(南齊) 또는 소제(蕭齊)라고칭한다.

서기 480 년에 백제(济)는 남제(齐)에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贡)을 바치기 시작하였다.

백제(济)와 남제(齐)6 차례 서로 왕래하였으며 백제(济)는 남제(齐)6 차례 조공(贡)을 바쳤다.

6 차례 중 한 차례는 육로로 남제를 왕래하였는데 왜냐하면 고구려(高句丽)가 그 당시 육로를 차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기 502 년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연(蕭衍)이 남제를 전복시키고 소양(梁)을 건립하여 국호를 양()이라고 칭하고 초대 왕 양무제(梁武帝)가 되었다.

웅진시대(熊津代)의 백제(济)는 양(梁) 나라에 6 차례 조공(贡)을 바쳤다.

백제왕(王) 여경(庆)과 백제왕(王) 모대(牟大) 때 백제의 관원(员)들은 모두 왕(王)이 천거한 후 남조(南朝)에서 관직을 책봉(封)하였다.

이와 같은 관직 천거 방식은 백성들의 인심을 사는데 도움이 되었고 왕위(王位)的를 공고(固)히 지켜주었으며 군신(
臣)들의 작란(乱)을 면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백제(济)와 남조(齐)의 우호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었다.
양서()-무제기(·武帝)에 보면 元年(502)四月,以镇东将军王余大进号将军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천감 원년(서기 502 ) 진동대장군(镇东将军) 백제왕(王) 여경(餘慶)의 호(号)를 정동대장군(
将军)이라고 바꾸어 주었다.” 는 뜻이다.

천감원년(元年)에 양정권(梁政权)에서는 고구려(高句丽)백제(济)와 일본의 모든 작위(爵位)를 책봉하였다.

양무제 보통(普通) 2년(서기 521년)에 진동대장군(镇东将军) 백제왕(王) 여융(余隆)을 영동대장군(将军)으로 봉작(封爵)했는데 무녕왕묘지(武宁王墓志)에서 실증(实證)되었다.

백제(济) 무녕왕(武宁王) 여융(余隆)의 책봉 1 년 전 양무제 보통(普通) 원년(元年 : 서기 520 년)에 소양(梁)에서 고구려왕(高句王)을 영동장군(东将军)이라고 책봉했는데 이 작위(爵位)는 백제왕(王) 여융(余隆)의 작위 영동대장군(将军) 보다 한 층 낮은 작위이다. 왜냐하면 양(梁) 나라에서는 백제(济)와 관계를 고구려 보다 더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백제(济)와 양(梁) 나라의 거리가 해로(海路)로 고구려 보다 훌씬 가깝기 때문이며 백제는 이미 양조(梁朝)와 조공 관계를 수립했기 때문이다. |
다음은 백제(济)와 북조(北朝)의 관계이다.

서기 475 년에 백제는 북위(北魏)에 청병 요청을 했으나 거절 당함으로써 북위(北魏)에 바치던 조공(贡)을 끊어 버렸다.

북위(北魏)의 원한(怨恨)은 점점 심해져서 북위 무제 영명(永明) 8년(서490 , 백제 모대왕(牟大王) 11 )에 위로(虏) 장군은 수 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济)를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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