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9일 수요일

북위(北魏)와 백제(百济)의 관계

북위(北魏)와 백제()의 관계:

서진(西晋)이 멸망() 한 후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황하 유역에서 통치권 쟁탈전을 벌였다.
결국 16()이 형성되었으며 사가(史家)들은 이 시기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라고 칭한다.
전진(前秦)이 서기 382 년에 잠정적으로 통일 시켰다.

그러나 북위의 도무제(道武帝 : 서기 386 - 서기 409 )는 비수(肥水) 전투에서 전진을 멸하고 북위(北魏 : 서기 386 - 서기 539 )를 건립하였다. 북위의 전신(前身)은 대국(代國)이다.

북위(北魏)가 북방(北方)을 통일 시킨 후 선비족(卑族)과 한족(汉族) 간의 모순을 완화시켰으며 한화정책(化政策)을 실현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북위의 제 3 대 왕 척발도(拓跋)() 나라의 정치제도(治制度)를 연구하고 유학()을 받아 들였으며 법률제도를 개혁하였다. 북위의 국력()은 점차적으로 온정을 되찾고 북방(北方)을 통치하게 되었다.

서기 450 년에 유송()의 북벌(北伐)이 실패로 돌아가자 북강남약(北强南弱)의 정세가 명확해졌다.

북위(北魏)의 세력이 강대(强大)해 짐에 따라 주변()의 여러 민족정권(民族政)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함은 물론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북위(北魏)가 북방을 완전히 통일 시키기 전부터 구려(高句)북위(北魏)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하였다.

한편 백제()는 서기 472 에 북위(北魏)와 조공() 관계()를 수립했는데 고구려 보다 40년 뒤늦게 조공 관계를 수립하였다.
백제(
) 연흥() 2(서기 472)에 북위(北魏)에 조공을 바쳤다.
서기 472 년에 백제()에서는 북위(北魏)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침공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백제의 사절단은 고구려의 죄상()을 열거하면서 고구려(高句)침공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북위(北魏) 왕조(王朝)백제()의 사절단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북위 조정에서는 백제()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에서는 북위의 조공을 끊어 버렸다.

백제()북위에게 조공을 바치는 목적은 출병하여 고구려()를 토벌해 주는데 있었다.

그 당시 고구려(高句)는 광개토왕(广土王)과 장수왕(长寿) 시기()라서 남정북전(南征北)하여 국토를 확장하던 때였으며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신라()와 고구려(高句)가 우호조약을 맺은 후 백제()는 자연적으로 고구려(高句) 장병()들이 총뿌리를 백제군을 향하여 겨누는 것을 사전에 방비하기 위하여 북위(北魏) 조정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백제()북위(北魏) 조정에 출병(出兵) 요구(要求)를 했지만 북위로 부터 확실한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고구려(高句)는 백제 보다 훨씬 먼저 북위(北魏)에 조공을 바쳐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고구려(高句)는 출병(出兵)하여 백제()를 침공하였고 북위(北魏) 조정에서는 수수방관 만 하고 있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북위(北魏)와 맺은 조공(朝貢) 관계를 파기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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