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시대(熊津时代) 백제(百济)와 중원왕조(中原王朝)의 관계:
서기 475 년에 고구려(高句丽)는 백제(百济)의 도성(都城) 한산성(汉山城)을 파괴시키고 백제(百济) 개로왕(盖卤王) 여경(余庆)을 살해하고 남여 8 천 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서기 475 년에 고구려(高句丽)는 백제(百济)의 도성(都城) 한산성(汉山城)을 파괴시키고 백제(百济) 개로왕(盖卤王) 여경(余庆)을 살해하고 남여 8 천 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한산성(汉山城)은 무참하게 파괴되어 항폐되었으므로 도성으로 복건할 수 없었다.
백제(百济) 문주왕(文周王)이 계위(继位) 한 후 그 다음해 10 월에 웅진(熊津 : 현재 韩国 忠清南道 公州)로 도읍을 천도하여 백제(百济)의 웅진(熊津)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백제(百济)는 한 숨을 쉴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동성왕(东城王 모대(牟大) 때 권신(权臣)들을 타파하고 국내(国内) 정치(政治) 국면(局面)은 온정 상태를 유지해 가며 국력(国力)을 부강하게 하였다.
동성왕(东城王) 모대(牟大)와 무녕왕(武宁王) 여융(余隆) 양대(两代)에 걸쳐 백제(百濟)는 중흥(中兴)되었고 국세(国势)는 점점 강성해 졌다.
또 한편 신라(新罗)와 고구려(高句丽)와 일본과도 우호(友好) 관계를 유지하였다.|
서기 476 년 백제(百济)가 웅진(熊津)으로 천도 한 후 유송(刘宋)에 조공(朝贡)을 바쳤다.
3 년 후인 서기 479 년에 유송 내의 황족들 간에 혼전이 발생했으며 대권은 소도성(蕭道成)에게 넘어 갔다.
소도성(蕭道成)은 유송(刘宋)의 제 8 대왕 순제(順帝 : 劉准)을를 폐위 시키고 국호를 제(齐)라고 칭하고 초대 왕에 군림하였다. 사가들은 제(齊)를 남제(南齊) 또는 소제(蕭齊)라고칭한다.
서기 480 년에 백제(百济)는 남제(南齐)에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朝贡)을 바치기 시작하였다.
백제(百济)와 남제(南齐)는 6 차례 서로 왕래하였으며 백제(百济)는 남제(南齐)에 6 차례 조공(朝贡)을 바쳤다.
6 차례 중 한 차례는 육로로 남제를 왕래하였는데 왜냐하면 고구려(高句丽)가 그 당시 육로를 차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기 502 년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연(蕭衍)이 남제를 전복시키고 소양(萧梁)을 건립하여 국호를 양(梁)이라고 칭하고 초대 왕 양무제(梁武帝)가 되었다.
웅진시대(熊津时代)의 백제(百济)는 양(梁) 나라에 6 차례 조공(朝贡)을 바쳤다.
백제왕(百济王) 여경(余庆)과 백제왕(百济王) 모대(牟大) 때 백제의 관원(官员)들은 모두 왕(王)이 천거한 후 남조(南朝)에서 관직을 책봉(册封)하였다.
이와 같은 관직 천거 방식은 백성들의 인심을 사는데 도움이 되었고 왕위(王位)的를 공고(巩固)히 지켜주었으며 군신(权
臣)들의 작란(作乱)을 면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백제(百济)와 남조(南齐)의 우호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었다.
다시 말하면 ”천감 원년(서기 502 년)에 진동대장군(镇东大将军) 백제왕(百济王) 여경(餘慶)의 호(号)를 정동대장군(征
东大将军)이라고 바꾸어 주었다.” 는 뜻이다.
천감원년(天监元年)에 양정권(梁政权)에서는 고구려(高句丽)와 백제(百济)와 일본의 모든 작위(爵位)를 책봉하였다.
양무제 보통(普通) 2년(서기 521년)에 진동대장군(镇东大将军) 백제왕(百济王) 여융(余隆)을 영동대장군(宁东大将军)으로 봉작(封爵)했는데 무녕왕묘지(武宁王墓志)에서 실증(实證)되었다.
백제(百济) 무녕왕(武宁王) 여융(余隆)의 책봉 1 년 전 양무제 보통(普通) 원년(元年 : 서기 520 년)에 소양(萧梁)에서 고구려왕(高句丽王)을 영동장군(宁东将军)이라고 책봉했는데 이 작위(爵位)는 백제왕(百济王) 여융(余隆)의 작위 영동대장군(宁东大将军) 보다 한 층 낮은 작위이다. 왜냐하면 양(梁) 나라에서는 백제(百济)와 관계를 고구려 보다 더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백제(百济)와 양(梁) 나라의 거리가 해로(海路)로 고구려 보다 훌씬 가깝기 때문이며 백제는 이미 양조(梁朝)와 조공 관계를 수립했기 때문이다. |
서기 475 년에 백제는 북위(北魏)에 청병 요청을 했으나 거절 당함으로써 북위(北魏)에 바치던 조공(朝贡)을 끊어 버렸다.
북위(北魏)의 원한(怨恨)은 점점 심해져서 북위 무제 영명(永明) 8년(서기 490 년, 백제 모대왕(牟大王) 11 년)에 위로(魏虏) 장군은 수 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百济)를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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