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장사(壯士)
송영문(宋令文)
:
송영문(宋令文)은 괵주홍농(虢州弘农
: 현재
하남성(河南省) 노씨(卢氏)사람이다.
당 나라
고종(高宗
: 서기 650
년
-
서기
683
년)
때
효위낭장(骁卫郎将)과 동대상정학사(东台详正学士)에 역임되었으며 붓글씨와 문장에 뛰어난
장사(壯士)였다.
하(夏)
나라와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의
3
대(三代)
전설중(传说中)
허다(许多)한 대력사(大力士)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夏)
나라 때의
국군(国君)
걸(桀)은
힘이 센 장사였기
때문에 철근을 자기 맘대로 굽혔다 폈다 했으며 맨손으로 곰과 호랑이를
잡았다.
상(商)
나라 때의
국군(国君)
은주(殷纣)는 9
마리의 소를 쓰러뜨렸고
기둥 뿌리를 두 손으로 뽑아 바꾸었으며 하(夏) 나라 궁씨국군(穷氏国君)
한착(寒浞)의 아들은 육지에서 배를타고 노를 저어 갈 정도로
큰 신력(神力)을 갖고
있었다.
전국시대(战国时代)에 힘센 장사들이 가장 많은 나라는
진국(秦国)이었으며 진국(秦国)에서는 대력사들에게
봉관(封宫)해 주는 법(法)도 있었다.
오적(乌获)과
임비(任鄙)와
맹설(孟说)
등은
500kg
의 바윗덩이를 불끈
들어 올렸다고 한다.
오적(乌获)은 장군(将军)이었고 임비(任鄙)는 한중군(汉中郡)
태수(太守)에 임명되었다.
진국(秦国)의 국군(国君)
무왕(武王)
역시
대력사(大力士)였는데 맹설(孟说)과 바윗덩이 들어오리기 시합을 하다가
팔의
힘(臂力)이 부족하여 무왕은 그만 바윗덩이를
무릎(膝盖骨)
위에 떨어뜨려
무릎이 부러지는 바람에
출혈이 심하여
그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임금이 죽은
죄를 맹설이 뒤집어쓰고 맹설(孟说)의
일가족(一家族)은
모두
피살(被杀)되었다.
진조(秦朝)
말년(末年)에 서초(西楚)
패왕(霸王)
항우(项羽)의
키는
8
척(尺)이었고 세발
달린 대형 솥을 번쩍 들어 하늘로 올렸다.
항우의
신력(神力)은 그 당시 자타가 공인(公认)하였다.
한무제(汉武帝)의 아들 관릉왕서(广陵王胥)도 3 발 달린 대형 솥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장사(壮士)였다.
당(唐)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 : 서기 626 년 - 서기 649 년) 정관연간(贞观年间)의
대력사(大力士)
송영문(宋令文)은
힘도 세고
문학적 재능도 출중한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장회관(张怀瓘)은 송영문에 관하여 “宋令文有三绝曰:书、画、力。”
이라고
찬탄했다.
다시 말하면
“송영문은 붓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으며 힘이 센 장사(壯士)였다.”
는
뜻이다.
다음과
같은 송영문에 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장안(长安)의 선정사(禅定寺)에 소가 한 마리 뛰어들어
난동을
부렸다.
아무도 날뛰는 소의
곁에 얼씬도 하지못하고 피신하였다.
송영문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나서 발광하는
소의 곁으로 다가가서
소의 두 뿔을 잡고
내동이 쳐 소의 경골(颈骨
: 목뼈)을 부러뜨려
단번에 죽여버렸다.
선정사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대경실색하였으며 송영문의 신력(神力)에 감탄하였다.
송영문(宋令文)은
고대판 스페인 투우사(鬪牛士)나 마찬가지였다.
송영문(宋令文)은 맹선(孟詵)과 노조린(盧照鄰)과 더불어 당(唐)
나라 때 저명한
의학가(醫學家) 손사막(孫思邈)의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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