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7일 화요일

동한(東漢)의 개국(開國) 공신(功臣) 송홍(宋弘 : ? ― 서기 40년)

동한(東漢)의 개국(開國)  공신(功臣)  송홍(宋弘 : ? ― 서기 40년










송홍(宋弘)의 자(字)는 중자(仲子)이고 경조장안(京兆长安 : 현재 섬서성(陕西省) 서안(西安))사람이다. 서한(西汉)의 소부(少府) 송상(宋尚)의 아들이며 동한(东汉) 초년(初年)에 대신(大臣)의 자리에 오른 명상(名相)이다. 송홍(宋弘)은 청렴결백(清廉潔白)한 관리이었으며 황제(皇帝)에게 거리낌 없이 직간(直谏)한 대신이었다.  


서한(西漢) 말년에 번숭(樊崇) 등이 영도한 눈썹에 붉은 색을 칠하여 왕망(王莽)의 군대와 구별했던 농민봉기군(農民蜂起軍)인 적미군(赤眉军)이 장안(长安)을 공격해 올 때 죽은체 하고 있다가 죽음을 면했다.


광무제(光武帝) 유수(刘秀)가 즉위(即位) 한 후 태중대부(太中大夫)와 대사공(大司空)을 역임历(任 )했다. 후에 송홍은 환담(桓谭)을 광무제에게 천거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환담(桓谭)이 거문고를사용하여 켜는 정악(鄭樂)에 매료되었으며 거문고를 함께 즐겼다.


송홍(宋弘)은 환담을 엄하게 꾸짖었다. 또 광무제(光武帝)에게도 여러차례 직간(直谏)하였다. 송홍은 품행청아(品行清雅)란 명예를 얻었으며 광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송홍(宋弘)은 선후(先后) 모두 30여 명의 현능지사들을 조정(朝廷)의 관직에 천거하였다. 후에 송홍(宋弘)상당태수(上党太守)를 불확실한 증거로 죄를 씌웠다고 탄핵(弹劾)을  받고 그 책임을 지고 관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생활하다가 수 년 후에 거세(去世)하였다.

 

 송홍(宋弘)은  어려서 부터 성격(性格)이  매우 온화(温和)하였다.  서한(西漢)  애제(哀帝 : BC 6년 - BC 1 년)와 평제(平帝 : 서기 1 - 서기 5 )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 왕망(王莽) 재위시(在位时) 송홍(宋弘)은 공공(共工)에 역임되었다. 공공(共工)이란? 왕망(王莽) 재위 때 소부(少府)를 공공(共工)이라고 개칭(改称)한 동일 관직이

 

경시(更始) 원년(元年 : 서23 년)에 적미군(赤眉军)이 장안으로 진입할 때 송홍은 강물 속에 스스로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다행히 집안 사람들의 구출(救出)로 살아남았으나 송홍(宋弘)은 죽은 체 하였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건무(建武) 원년(元年 : 서기 25 년)광무제(光武帝) 유수(刘秀)가 동한(東漢)의 초대 임금으로 즉위(即位)하고  동한(东汉) 정권(政权)이  건립됨에 따라 송홍(宋弘)은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任命)되었다.

 

건무(建武) 2 년(서기 26 에 송홍(宋弘)은 왕량(王梁)이 역임하였던 대사공(大司空) 직(職)에 임명됨과 동시에 순읍후(栒邑侯)이란 작위(爵位)를 받았다.  송홍(宋弘)은 그 당시 받은 지조(地租) 봉록(俸禄)을 모두 친족(親族)들에게 분배해 주고 자기의 자산(资产)은 하나도 없었다. 후에 송홍의 작위(爵位)는 선평후(宣平侯)로 개봉(改封)되었다.


 광무제(光武帝)가 송홍(宋弘)에게 "조정(朝廷) 내에서 누가 학식(学识)에 연박(渊博)한 인재(人材)냐?" 고 물었다. 송홍(宋弘)은 서슴치 않고 "패국인(沛国人) 환담(桓谭)이라고 아뢰며 환담(桓谭)학식이 풍부(丰富)하고 견문(见闻)이 넓으며 서한(西漢)의 저명한 경학가(经学家)요, 문학가(文学家)이었던 유향(刘向 : BC 77 년 — BC 6 년)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만큼 훌륭한 인재입니다." 고 천거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즉시 환담(桓谭)을 불러 의랑(议郎)에 임명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연회(宴会) 때 마다 환담(桓谭)을 불러 거문고를 연주케 하였으며 번잡(繁杂)한 거문고 소리를 듣고 즐거워 하였다. 송홍(宋弘)의 마음은 상했으며 환담(桓谭)을 관직에 천거한 것을 크게 뉘우치고 있었다


송홍(宋弘)자기 사무실로 환담(桓谭)을 불렀다. 환담(桓谭)송홍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앉으라는 말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즉각 송홍(宋弘)은 환담에게 我推荐你的目的是想让你用道德来辅助皇上但现在你多次弹奏郑乐来扰乱雅颂正音你不是一个忠诚正直的人能自己改正吗还是让我依法来治你的罪呢라고 한담(桓谭)에게 질책하였다.


얼마 후에 광무제(光武帝)는 군신들을 모아놓고 또 대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광무제는 환담에게 거문고를 연주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환담(桓谭)은 송홍(宋弘)의 면전(面前)에서 송홍의 얼굴 만을 쳐다보며 자신감을 잃고 실의에 잠겨 있었다.


광무제(光武帝)는 기괴(奇怪)하다는 듯 송홍을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송홍(宋弘)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탈모(脱帽)한 후 광무제를 향하여 我推荐桓谭的目的是希望他能以忠诚正直来引导皇上他却使皇上喜欢听郑乐是我的罪过라고 아뢰었다.


다시 말하면 소인이 환담을 천거할 때 황상(皇上)에게 정직하고 충성심있는 신하로써 황상(皇上)을 보필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해 주기를 희망했었습니다. 그런데 환담을 지금까지 지켜 본 결과 황상(皇上)에게 정악(鄭樂)이나 들려줌으로써 황상(皇上)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음악인 역활 만 하고 있으니 소인의 죄과(罪過)를 크게 뉘우치고 있는 바 입니다.” 는 뜻이다


광무제는 송홍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색이 변하더니 환담(桓谭)에게  "너의 의복을 관복(官服)으로  바꾸어 입으라." 고 말했다이후 부터 광무제는 다시는 환담에게 거문고로 정악을 켜지 않게 하였다송홍은  그후에도 마익(冯翊)과 환량(桓梁) 등 저명한 현사(贤士) 30여 명을 광무제에게 천거하여 공경(公卿)에 담임케 하였다. 그 정도로 송홍은 광무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송홍(宋弘)은 임직(任职) 5 후에 아무런 명확한 죄가없는 상당태수(上党太守)에게 죄(罪)를 씌운 혐의로 인하여 탄핵을 받고 관복을 벗었으며 회가(回家)한 후 수년(数年) 후에 자기 집에서 거세(去世)하였으며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봉국(封国)은 자연적으로 철회되었다.  


송홍이 관직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송홍(宋弘)은 광무제(光武帝)를 알현하려고 황실(皇室)을 방문하였다. 그때 마침 광무제(光武帝)는 새로 들여 온 병풍(屏风) 앞에 앉아서 병풍(屏风) 위에 그려진 아름다운 여인들의 육체미를 감상하고 있었다. 광무제는 송홍을 상견하는 도중에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병풍 속에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여인상을 감상하고 있었다.


송홍(宋弘)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没有见过喜欢美德如喜欢美色的人이라고 광무제에게 아뢰었다.


다시 말하면 여색을 즐기는 사람치고 미덕을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는 뜻이다.


이 말은  "논어(论语)-자한(子罕)" ()에 수록되어 있는  "吾未见好德如好色者也“  라는 말에서 따온 말인데  다시  말하면  나는 지금까지 색()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는 뜻이다.

 

광무제(光武帝)는 송홍이 하는 이 말을 듣자마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고  즉시 병풍(屏风)을 걷어치우라고 신하들에게 어명을 내렸다.


광무제는 만면에 웃음을 띄며 송홍(宋弘)을 향하여 听到符合道义的话就服从行么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말은 도의(道義)에 매우 합당한 말이오! 그대로 복종하겠오!” 란 의미이다.


송홍(宋弘)은 광무제에게 陛下修养品德我非常高兴이라고 아뢰었다.


다시 말하면 폐하께서 품덕을 수양하시는 모습에 다시 한 번 감탄하오며 소인의 기쁨은 이루다  형용 할 길이 없아옵니다.” 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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