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8일 화요일

냉이(薺菜)의 전설(傳說) - (3) 설평귀(薛平貴)와 왕보천(王寶釧)의 사랑

냉이(薺菜)의 전설(傳說) - (3)   설평귀(薛平貴)와  왕보천(王寶釧)의 사랑
당(唐) 나라 말기(末期) 승상(丞相) 왕윤(王允)의 셋째 딸 왕보천(王寶釧)은 수를 놓아 만든 볼(Ball : 繡球)을 던져 사윗감을 선택하는 경쟁을 벌였다승상의 딸 왕보천은 자기가 손수 수를 놓아 만든 볼을 수 많은 총각들이 모여있는 속으로 던졌다. 거지 설평귀(薛平貴)가 볼을 받았다. 승상(丞相)은 물론 거지 설평귀와 자기 딸이 결혼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설평귀(薛平貴)와 왕보천(王寶釧)은 한 밤중에 모든 사람들이 잠을자고 있는 틈을 타서 장안성(長安城) 남(南)쪽에 있는 오전파(五典坡)로 함께 도망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량국(西涼國)이 당(唐) 나라를 침공해 왔다. 서량(西凉) 왕조(王朝)는 한(汉) 나라와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 때 청해(青海)와 감숙(甘肃)과 내몽고(内蒙古)와 신강(新疆) 일대(一带)의 소수민족(少数民族)들이 건립한 정권(政权)이었으며 서기전 205 년(年)에 건립되었다.
설평귀(薛平貴)는 당 나라의 서정군대(西征軍隊)에 가담하였다.  전란(戰亂) 중에 설평귀(薛平貴)는 서량국(西涼國)의 포로(俘虜)되어 부마(駙馬)에 임명되었다. 부마란? 말을 관리하는 직위를 일컫는다. 대분의 고향 사람들은 설평귀가 전사(戰死)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보천(王寶釧)한요(寒窯)에서 18 을 수절하며 설평귀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렸다. 18 년 동안 왕보천(王寶釧)은 냉이(薺菜)를 뜯어 먹으며 주린배를 채우고 배고픔을 면했다. 왕보천은 한요(寒窯) 부근(附近)에 자라고 있는 냉이를 모두 뜯어 먹었으므로 10 여리 안팎에 냉이가 보이지 않았다. 냉이는 18 년 동안 왕보천의 생명을 유지시켜 준 유일한 먹거리였다.
후에 설평귀는 혁혁(赫赫)한 전공(戰功)을 세우고 서량국(西涼國) 공주(公主)와 결혼하였으며 후에 서량국(西涼國)의 국주(國主)가 되었다. 18 년이 지난 후 설평귀는 왕보천(王寶釧)이 머물고 있는 한요(寒窯)를 방문하고 왕보훈과 만나게 되었다. 설평귀는 왕보천(王寶釧)을 정궁(正宮) 황후(皇后)로 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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