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薺菜)의 전설(傳說) - (3) 설평귀(薛平貴)와 왕보천(王寶釧)의 사랑
당(唐) 나라 말기(末期) 승상(丞相) 왕윤(王允)의 셋째 딸 왕보천(王寶釧)은 수를 놓아 만든 볼(Ball : 繡球)을 던져 사윗감을 선택하는 경쟁을 벌였다. 승상의 딸 왕보천은 자기가 손수 수를 놓아 만든 볼을 수 많은 총각들이 모여있는 속으로 던졌다. 거지 설평귀(薛平貴)가 볼을 받았다. 승상(丞相)은 물론 거지 설평귀와 자기 딸이 결혼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설평귀(薛平貴)와 왕보천(王寶釧)은 한 밤중에 모든 사람들이 잠을자고 있는 틈을 타서 장안성(長安城) 남(南)쪽에 있는 오전파(五典坡)로 함께 도망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량국(西涼國)이 당(唐) 나라를 침공해 왔다. 서량(西凉) 왕조(王朝)는 한(汉) 나라와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 때 청해(青海)와 감숙(甘肃)과 내몽고(内蒙古)와 신강(新疆) 일대(一带)의 소수민족(少数民族)들이 건립한 정권(政权)이었으며 서기전 205 년(年)에 건립되었다.
설평귀(薛平貴)는 당 나라의 서정군대(西征軍隊)에 가담하였다. 전란(戰亂) 중에 설평귀(薛平貴)는 서량국(西涼國)의 포로(俘虜)가 되어 부마(駙馬)에 임명되었다. 부마란? 말을 관리하는 직위를 일컫는다. 대분의 고향 사람들은 설평귀가 전사(戰死)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보천(王寶釧)은 한요(寒窯)에서 18 년을 수절하며 설평귀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렸다. 18 년 동안 왕보천(王寶釧)은 냉이(薺菜)를 뜯어 먹으며 주린배를 채우고 배고픔을 면했다. 왕보천은 한요(寒窯) 부근(附近)에 자라고 있는 냉이를 모두 뜯어 먹었으므로 10 여리 안팎에 냉이가 보이지 않았다. 냉이는 18 년 동안 왕보천의 생명을 유지시켜 준 유일한 먹거리였다.
후에 설평귀는 혁혁(赫赫)한 전공(戰功)을 세우고 서량국(西涼國) 공주(公主)와 결혼하였으며 후에 서량국(西涼國)의 국주(國主)가 되었다. 18 년이 지난 후 설평귀는 왕보천(王寶釧)이 머물고 있는 한요(寒窯)를 방문하고 왕보훈과 만나게 되었다. 설평귀는 왕보천(王寶釧)을 정궁(正宮) 황후(皇后)로 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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