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문도(王文度)는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되어 백제(百济) 지방(地方)의 모든 군정사무(军政事务)를 담당하였고 백제(百济)의 잔당(残党)들을 보호하며 고구려(高句丽)를 정복하기 위한 기재(奇才)들을 불러모았다.
9月에 소정방(苏定方) 장군(将军)은 조선반도(朝鲜半岛)에서 배를 타고 해로(海路)를 경유하고 육로(陆路)를 이용하여 낙양(洛阳)으로 돌아왔다.
백제왕(百济王) 부여의자(扶余义慈)와 왕비(王妃) 은고(恩古)와 태자(太子) 부여융(扶余隆)과 왕자(王子) 부여태(扶余泰)를 비롯하여 13명의 왕족(王族)들과 700여 명의 백제고관(百济高官)들과 장수(将领)들을 포함하여 모두 12000여 명의 백제(百济) 상층(上层) 인사(人士)들을 데리고 당(唐) 나라로 들어왔다.
당고종(高宗) 황제(皇帝)는 백제(百济) 왕실(王室)들에게 특사령(特赦令)을 내리고 고규격(高规格) 정치(政治) 예우(礼遇)를 해주었으며 당 나라 민족(民族)들과 대가정(大家庭)을 형성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얼마 후에 부여의자(扶余义慈)는 세상을 떠나고 당고종(高宗) 황제(皇帝)는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禄大夫)를 하사하고 위위경(卫尉卿)이라고 불렀다.
백제의 옛날 신하들에게 의자왕의 상례를 지내라고 허락하였다.
그리고 의자왕의 시신을 대당(大唐) 명장(名将) 진숙보(秦叔宝)의 묘(墓) 옆에 안장하여 주었으며 의자왕의 묘 옆에 묘수(墓树)와 비석(碑石)도 세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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