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隋朝)와 백제(百济)
수 나라와 조선반도 내의 세 나라와 관계 중 (1) 수 나라와 고구려의 관계와 (2) 수 나라와 백제와 신라의 관계로 나누어 생각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백제와 신라에서는 수 나라에게 출병시켜 고구려를 쳐부숴 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는 서로 앞을 다투어 사신들을 수 나라에 보내어 수 나라와 더 좋은 우호 관계를 누리려고 노력하였다.
조선반도(朝鲜半岛)의 삼국(三国) 중 백제(百济)는 고구려(高句丽) 남침(南侵)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조선반도(朝鲜半岛)의 삼국(三国) 중 백제(百济)는 고구려(高句丽) 남침(南侵)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제(百济)는 수(隋) 나라와 통상을 원했고 수 나라에 조공(朝贡)도 바쳤다.
수문제(隋文帝) 개황(开皇) 원년(元年 : 서기 581 년에 백제(百济) 위덕왕(威德王)은 사절단을 수 나라에 파견하여 수(隋) 나라에 조공(朝贡)을 바쳤다.
수문제(隋文帝) 개황(开皇) 원년(元年 : 서기 581 년에 백제(百济) 위덕왕(威德王)은 사절단을 수 나라에 파견하여 수(隋) 나라에 조공(朝贡)을 바쳤다.
수문제(隋文帝)는 서기 589 年에 남조(南朝)의 진(陈) 나라를 멸하고 통일중국(统一中国)을 이룩하였다.
백제(百济)에서는 즉시 사절단을 파견하여 수(隋) 나라를 축하(祝贺)해 주었다.
수문제(隋文帝)는 백제에서 보낸 사절단을 영접하였다.
그리고 나서 수문제(文帝)는 백제의 사절단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전해주며 백제 위덕왕에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
”我们虽然相隔万里,但相互理解如同亲见。已经知悉百济王的淳至心迹,但两地往复至难,今后百济就不用年年入贡了,隋也不会年年遣使前往."
다시말하면" 우리 두 나라는 만리나 떨어져 있지만 서로 이해하고 친족 처럼 지냅시다. 이미 백제왕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텁다는 것을 들어서 알지만 두 나라가 서로 왕래하기 어려우니 이후 부터는 매년 조공을 바칠 필요 없으며 수 나라에서도 매년 사절을 파견할 필요도 없오.” 라는 뜻이다.
서기 598年에 백제 위덕왕(威德王)은 수문제(隋文帝)가 고구려(高句丽)를 침공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문제가 백제 위덕왕의 요청을 들어 주는 표시였다.
그러나 고구려(高句丽)에서는 수문제에게 사죄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를 침공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수문제는 백제 위덕왕에게 고구려를 침공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
후에 고구려의 고원왕(高元王)은 백제 위덕왕이 수문제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 보복으로써 백제의 북방 변경을 침략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다.
수양제(隋炀帝) 대업(大业) 3 년(서기 607년)에 백제(百济) 무왕(武王)은 두 차례에 걸쳐 수 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또 다시 고구려를 침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수양제(隋炀帝) 대업(大业) 3 년(서기 607년)에 백제(百济) 무왕(武王)은 두 차례에 걸쳐 수 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또 다시 고구려를 침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수양제(隋炀帝)는 백제 무왕의 요청을 쾌히 승락하였다.
수양제는 백제(百济) 무왕에게 고구려(高句丽)의 동정(动静)을 자세히 정찰해 보라고 부탁하였다.
서기 612 년에 수양제(炀帝)는 대군(大军)을 이끌고 고구려(高句丽)를 침공하였다.
백제(百济) 무왕(武王)은 군대를 북방 변경에 파견하여 수의 고구려 침공을 도왔다.
그러나 백제는 수 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수양제(隋炀帝) 대업(大业) 10년(서기 614 년)에 백제(百济)는 최후(最后)로 한 차례 더 수(隋) 나라에 조공(朝贡)을 바쳤으며 그후로 수(隋) 나라 내에 대란이 발생하여 조공(朝贡)은 바치지 못했다.
수양제(隋炀帝) 대업(大业) 10년(서기 614 년)에 백제(百济)는 최후(最后)로 한 차례 더 수(隋) 나라에 조공(朝贡)을 바쳤으며 그후로 수(隋) 나라 내에 대란이 발생하여 조공(朝贡)은 바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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