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 때 중일(中日) 양국은 가장 가까운 우방 국가로써 서로 왕래가 빈번하였다.
서기 663 년(唐高宗 李治 显庆 五年)에 제 일 차 해전(第一场海战)이 백강구에서 발발하였다.
백강구 (白江口)는 백촌강(白村江)이라고도 칭하는데 현재 금강(전라북도 锦江 하류(下流)의 군산만(群山湾을 일컫는다.
당(唐) 나라 초기(初期)에 조선반도(朝鲜半岛)는 신라(新罗)、백제(百济)、고구려(高句丽)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이른바 조선삼국(朝鲜三国) 시대(时代)를 형성하고 있었다.
신라와 당 나라는 우호 관계에 있었고 백제(百济)는 일본(日本)과 인접 국가였으며 고구려(高句丽)는 홀로 조선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하였다.
백제(百济)와 일본(日本)은 연합(联合)하여 신라(新罗)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당(唐) 나라 초기(初期)에 국내(国内) 사정이 복잡다단하여 조선반도(朝鮮半岛)의 문제를 해결 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당태종(唐太宗)은 신라(新罗)와 백제(百济)와 고구려(高句丽)를 달래고 있었다.
당고종(唐高宗) 때 일본(日本)은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는 당 나라 군대를 신라(新罗)에 파견하여 백제(百济)를 공격하였다.
좌위대장군(左卫大将军)소정방(苏定方)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설당(说唐)에 의하면 "소정방(苏定方)의 인상(印象)은 그다지 좋지 않았으며 소정방은 태종의 혈족(血族)도 아니었으나 태종(太宗) 때 당 나라의 무적상장(无敌上将)이었다.
소정방은 북벌돌궐(北伐突厥), 서정총령(西征葱岭),동토백제(东讨百济) 등 허다한 전공을 세운 대장군이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총령(葱岭)은 파미르(Pamir) 고원인데 티베트와 인도와 아프카니스탄과 타림(Tarim) 분지 등에 포위된 5000m 이상의 고원지대이다. 최고(最高) 지역은 7800m 의 무스타그 아타(Mustag Ata)로써 "세계의 지붕" 이라고 일컫는다.
또 구당서(旧唐书)에 보면 “定方前后灭三国,皆生擒其主。”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소정방(苏定方)은 전후 3 국을 멸하고 왕들을 생포하였다.” 는 뜻이다.
소정방이 총사령관에 임명될 당시 69 세(岁)의 백발노인(白发老人)이었다.
백강구해전(白江口海戰) 때 소정방(苏定方)이 명성을 날린 후 유인궤(刘仁轨)가 또 명성을 날렸다.
서기(公元) 660 年 3 月(唐 显庆 五年,新罗 武烈王 七年)에 소정방이 이끄는 수륙대군(水陆大军) 13 만 명과 전선(战船) 1900 척(艘)과 신라군대 50000 명을 합하여 모두 18만 군대가 백제(百济)를 침공하였다.
백제(百济) 군사들은 웅진강구(熊津江口 : 현재 韩国南部 금강입구(锦江入口))에서 나당 연합군에 저항하였으나 소정방(苏定方)이 친히 이끄는 정병(精兵)들은 금강을 건너 진격(进击)하여 백제군(百济军)을 대파하였고 수 천명의 백제군은 전사하였다.
소정방(苏定方) 군대는 백제(百济)의 도성(都城) 구발성(俱拔城 : 현재 전주(全州))를 함락하였다.
전주성(全州城) 20 리 밖에서 백제 군사들이 반격하였으나 당군에 의하여 수 만명이 사살되었다.
백제(百济)의 의자왕(义慈王)과 태자(太子) 융(隆)은 북쪽으로 달아났다.
당군은 의자왕을 계속 추격하여 의자왕과 태자 융은 어찌할 도리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당군(唐军)이 떠난 후 서기(公元) 663 年 8 月(唐龙朔三年,新罗文武王三年에 백제무왕(百济武王)의 조카(从子)이며 의자왕의 4 촌 동생인 귀실복신(鬼室福信)은 주류성(周留城 : 현재 한산(韩山))에서 백제 고토(故土)의 회복운동을 전개 하였다.
일본에서 지반을 닦고있던 백제왕(百济王) 부여풍(扶余丰)은 일본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나당 연합군은 당군(唐军) 7000 명과 신라군(新罗军) 5000 명과 전선(战船) 170 여척(艘)이 있었고 왜백군(倭百军)은 47,000 명으로써 그중 왜군(倭军) 42,000 명과 백제군(百济军) 5000 명과 전선(战船) 400 여척(艘이 있었다.
백강구(白江口 : 현재 韩国 锦江 下流 群山湾 白村江口에서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으나 왜백연합군(倭百聯合军)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 보다 몇 배의 병력(兵力)과 전선(戰船)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서기(公元) 668年(唐 总章 元年,新罗 文武王 七年)十一月에 나당연합군(唐新联军)은 고구려(高句丽)를 공격하여 평양성(平壤城)을 함락하였고 드디어 최후 승리(最后胜利)를 얻어 고구려(高句丽)와 백제(百济)를 멸망시켰고 일본군은 본국으로 되돌아 갔다.
그후로 부터 900 년 간 일본군은 조선반도(朝鲜半岛)에 용병(用兵)의 꿈을 포기하였다.
당(唐) 나라는 백제(百济)와 고구려(高句丽)를 멸망시킨 후 조선반도(朝鲜半岛) 안에 안동도호부(安东都护府)를 설치하였다.
일본민족(日本民族)은 강자(强者)를 존중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백강구해전(白江口海战) 이후 일본(日本)은 당(唐) 나라에 수 많은 사절단을 파견하여 당 나라와 교역을 증진시켰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