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시대(泗泌时代)의 백제(百济)와 남북조(南北朝)의 관계:
서기 538 년 백제(百济) 성왕(圣王) 농(农)은 사비성(泗沘城 :현재 韩国 扶余)으로 천도하여 서기 660 년 당(唐) 나라가 출병(出兵)하여 백제(百济)를 멸망 시킬 때 까지 사비성은 백제의 도읍이었다.
다음은 사비성(泗沘城) 시대(时代)의 백제(百济)와 남북조(南北朝)의 관계이다.서기 538 년 백제(百济) 성왕(圣王) 농(农)은 사비성(泗沘城 :현재 韩国 扶余)으로 천도하여 서기 660 년 당(唐) 나라가 출병(出兵)하여 백제(百济)를 멸망 시킬 때 까지 사비성은 백제의 도읍이었다.
사비시대(泗沘时代) 전기(前期)에 백제(百济)와 신라(新罗)의 관계에 일대 변화가 발생하였다.
서기 548 년 신라(新罗)는 백제(百济)를 도와고구려(高句丽)와 예족(秽人)을 침공하였다.
서기 553 년에 신라(新罗)는 고구려와 합세하여 백제(百济)를 침공하여 백제(百济)의 동북 변방의 땅을 빼앗았다.
이로 인하여 백제(百济)와 신라(新罗)의 우호(友好) 관계는 깨어졌으며 한 때 백제의 우방(友邦)이었던 신라는 백제와 적국이 되어 버렸다.
백제(百济)와 고구려(高句丽)와 신라(新罗)는 서로 양면 작전을 개시하였다.
삼국(三国) 중 백제(百济)가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으며 항상 전쟁의 초점이 되었다.
백제(百济)는 사비성(泗沘城)으로 천도한 후 계속 소양(萧梁)에 조공을 바쳤다.
진(陈) 나라가 양(梁) 나라를 이어 남조(南朝)를 통치할 때 백제(百济)와 진(陈) 나라는 조공(朝贡) 관계를 수립하였다.
진(陈) 나라는 서기557 년에 건립되어 서기 589 년에 망했다. 백제(百济)와 진(陈) 나라는 서로 5 차례 왕래가 있었는데 백제(百济)는 4 차례 조공을 바쳤고 진(陈) 나라에서는 한 차례 책봉차(册封次) 백제를 방문하였다.
다시 말하면 ”진(陳) 나라 천희(天嘉) 3 년(서기 562 년) 윤(潤) 2월 기유일(己酉日)에 백제왕 여명(餘明)은 무동대장군(抚东大将军)에 책봉되었고,고구려왕(高句骊王) 고탕(高汤)은 영동장군(宁东将军)에 각각 책봉되었다.” 는 뜻이다.
남조(南朝)의 정권(政权) 교체로 인하여 양(梁) 나라의 정국(政局)이 불온(不稳) 상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百济)는 13 년 동안 계속 조공(朝贡)을 바쳤고 고구려(高句丽)는 오직 1 년 만 진(陈)에 조공(朝贡)을 바쳤다.
그러므로 백제는 동진(东晋)과 유송(刘宋) 이래로 남조(南朝) 때 까지 계속 양호(良好)한 조공(朝贡) 관계를 유지해 왔다.
서기 589 년에 수문제(隋文帝)는 진(陈)을 멸망시키고 남북을 통일시켰다.
북제(北齐)와 북주(北周)가 북방(北方)을 통치 한 후 백제(百济)와 북조(北朝)의 관계는 점점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백제(百济)와 신라(新罗)의 관계는 파열(破裂)된 상태였다.
백제(百济)는 북조의 지원을 원했기 때문에 웅진시대(熊津时代)에 남조(南朝)에 바치던 조공정책(朝贡的政策)을 바꾸어 북제(北齐)와 북주(北周)와 조공 관계를 수립하였다.
백제(百济)는 북제 초대왕 문선제(文宣帝: 高洋) 천보(天保) 원년(元年 : 서기 550 년)에 북제(北齐)에 세 차례 조공(朝貢)을 바쳤다.
백제(百济)는 북제 초대왕 문선제(文宣帝: 高洋) 천보(天保) 원년(元年 : 서기 550 년)에 북제(北齐)에 세 차례 조공(朝貢)을 바쳤다.
북제(北齐)에서는 두 차례 책봉(册封)을 위하여 백제를 방문하였다.
백제(百济)의 제 1 차 조공 후 17 년 만에 제 2 차 조공이 바쳐졌으며 제 2 차 조공 후 5 년 후에 제 3 차 조공이 바쳐졌다.
이는 백제의 국내 사정 때문이었다.
이는 백제의 국내 사정 때문이었다.
제 1 차 조공 때 북제는 백제왕(百济王)에게 표기대장군(骠骑大将军)의 작위를 부여했고 제 2 차 책봉(册封) 때는 백제왕(百济王)에게 도독동청주제사(都督东青州诸事)란 작위를 책봉하였다.
북제(北齐)는 제 2 차 책봉 때 백제왕(百济王)의 작위(爵位)를 강등시켜 봉하였다. 왜냐하면 너무 긴 세월 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했기 때문이었다.
수서(隋书)—백관상(百官上)과 위서(魏书)-관제(官制)에 기록된 것을 보면 표기대장군(骠骑大将军)은 무동대장군(抚东大将军) 보다 한 층 더 높은 작위이며 남조에서 백제왕(百济王)에게 부여했던 작위(封爵) 보다 높다.
북제(北齐)에서는 백제왕(百济王)의 작위(封爵)를 고구려왕(高句丽王)의 작위 보다 한 층 더 높은 작위(封爵)를 부여했다.
북주(北周)가 북제(北齐)를 멸한 후 백제(百济)는 북주(北周)와 조공(朝贡) 관계를 수립하였다.
북주(北周)가 북제(北齐)를 멸한 후 백제(百济)는 북주(北周)와 조공(朝贡) 관계를 수립하였다.
백제에서는 북주에 2년 동안 입공(入贡)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주(北周)에서는 백제왕(百济王)에게 책봉(册封)을 하지 않았다.
백제(百济)에서 제 2 차 조공을 바친 후 3 년이 지나 북주(北周)는 수(隋) 나라에게 멸망 당했다.
수문제(隋文帝)가 서기 581 년 북주(北周)를 멸한 후 백제(百济)는 북조(北朝)와 조공(朝贡) 관계를 완전히 종결시켰다.
양(梁) 대동(大同) 7 년(서기 541년)에 백제는 양 나라에 조공을 바친 대가로 열반경(涅盘)을 비롯하여 의공(医工)과 공장(工匠)과 화사(画师)와 모시박사(毛诗博士)와 기타 물품을 요구하였다.
백제(百济)가 남조(南朝)에 조공(朝贡)을 바친 목적은경제적인 목적과 문화 수입이 위주였다.
한편 백제(百济)와 북조(北朝)의 조공(朝贡) 관계는 주로 정치(政治)와 군사면에 목적을 두었다.
백제(百济)는 북조(北朝)에 조공(朝贡)을 바침과 동시에 북조(北朝)에 청병(请兵)을 요청하였다.
물론 백제(百济)와 북조(北朝)의 왕래(往来)는 경제(经济)와 문화교류(文化交流)도 이루어 졌으며 관방(官方)과 민간(民间) 교류도 겸하여 이루어졌다.
조공(朝贡)의 목적이정치(政治)와 군사(军事) 면에 있거나 경제(经济)와 문화(文化) 면에 있거나 조공국(朝贡國)과 피조공국(被朝贡国) 간의 정치관계(政治关系)와 경제관계와 문화(文化)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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