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보살(皇帝菩萨)
”양무제(梁武帝)"
불교(佛教)의 자비이론(慈悲理论)
중 가장 많이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포시(布施)와
불살생(不殺生)이다.
불살생(不杀生)의 가장 직접적(直接的)인 실천은 소식(素食)이다.
중국(中国)
불교(佛教)의
소식문화(素食文化)
전통(传统)
중 역사상(历史上)
저명(著名)한 “황제보살(皇帝菩萨)”——양무제(梁武帝
: 소연(萧衍))을 빼놓을 수 없다.
양무제는 불교(佛教)의 소식제도(素食制度)를 건설(建设)한 후 직접(直接)
스스로 참여(参与)하였으며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고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양무제(梁武帝
: 서기 502 년 - 서기 549 년)는 약
반세기(半个世纪)
동안 통치하는 중
불교(佛教)의
중흥을 제창(提倡)하여
수 많은 사원(寺院)과 사탑(寺塔)을 건립하였으며 명승(名僧)들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唐)
나라 때 저명한 시인(诗人)
두목(杜牧)의 강남춘(江南春)이란 시(詩) 속에 다음과 같은 명시구(名詩句)가 있다.
“千里莺啼绿映红,水村山郭酒旗风。
南朝四百八十寺,多少楼台烟雨中。"
다시 말하면 “남조 때 건립한 480
개의 사원의 대부분이 안개 속에 파뭍여
있다.”
는 뜻이다.
양무제(梁武帝)는 사원을 건립하고 수리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통계(统计)에 의하면 남양시(南梁时)
불교(佛敎) 사원(寺院)의 숫자는 2846
개에 달했고 승려(僧侶)들의 숫자는 82,700
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양무제(梁武帝)가 즉위(即位)한 후 제 3
년쩨 되는해 천감(天监)
3
년(서기 504
년)
농력(农历)
4
월 초팔일(初八日)에 20,000여명의 승려와 불도들이 도성(都城)
건강(建康
: 현재 江苏省
南京)에 모인 가운데에서 자신이 불교(佛教)에 귀의(歸依)한다고 정식선포(正式宣布)하였다.
양무제는 왕공귀족(王公贵族)에서 부터 평민백성(平民百姓)들에 이르기 까지 모두 불교(佛教)를 신봉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천감(天监)
18
년(서기 519
년)에 양무제(梁武帝)는 무애전(无碍殿)에서 정식(正式)으로 보살계(菩萨戒)를 받았기 때문에 사서(史書)에 양무제는 “황제보살(皇帝菩萨)”로 수록되어 있다.
불교사상(佛教思想)은 양무제(梁武帝)에게 지대한 영향(影响)을 미쳤다.
사서(史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一冠三年,一被二年”。
다시 말하면 “양무제는 왕관을 3
년 동안 쓰고 이불은 2
년 동안 세탁하지 않고 덮고
잤다.”
는 뜻인데 양무제의 과도한 절약정신을 나타내 주고
있다.
양무제(梁武帝)는 지나치게 절약하는 생할(生活)을 하였다.
"日一蔬食,过午不食,草履葛巾,罗绮不染。"
라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매일
채식을 했으며 과오불식(过午不食)을
철저히 실행하였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며 갈포로 만든
두건을 쓰고 다녔고 의복에 염색을 하지 않고 입었다.“
는 뜻이다.
또 양무제는 50세(岁)
후 부터 방사(房事)를 스스로 금했으며 빈비(妃嫔)들로 부터 항상 거리를 두었다.
양무제는 불교(佛教)의 자비(慈悲)와
계살(戒殺)
이론(理论)을 철저하게 지킨 황제였으며 국가(国家)에서 제사(祭祀)를 지낼 때 계살(戒杀)을 적용시켰으며 원래(原来)
돼지고기(猪)와 소고기(牛)와 양(羊)
고기를 사용하여 지내던 제품들을 모두 채소와 과일로 대체(代替)시켰다.
또
양무제는 평상시 태의(太医)들에게 충(虫)과 축(畜)을 입약시(入药時) 사용하지 못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또 직물(織物)의 표면에 조수(鸟兽)의 형상(形狀)을 그려넣지 못하게 하였다.
이와같은 양무제의 자비관(慈悲观)은 인도불교(印度佛教)의 계율(戒律)
보다 진일보 발전한 중국 고유의
계율이었다.
양무제(梁武帝)는
만년(晚年)에 친히《자비도장참법(慈悲道场懺法)》(속칭(俗称)
《양황보참(梁皇宝懺)》또는 《양황참(梁皇懺)》)이라고도 칭하는 저서를 편찬했는데 현재까지 유전(流传)되어
오고있다.
양무제는 살아 생전에 불경(佛经)
연구(研究)에
정력과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리하여 양무제는《대품반야경주해(大品般若经注解)》와《대열반경강석(大涅槃经讲释)》과《정명경의기(净名经义记)》등 불경주석(佛经注释)을 편찬하였고 양무제 스스로 불경(佛经)
설법(说法)을 강해하였다.
또
양무제는 서기 527년과
서기 529년과
서기 546년과
서기 547년
등 4 차례에 걸쳐서
사신사원(捨身寺院)하였다.
사신사원(捨身寺院)이란?
수행(修行)과 보은(報恩)을
위하여 속계(俗界)에서의 몸을 버리고 불문(佛門)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양무제의 군신(群臣)들은 수 억원을 출자(出资)하여 양무제의 속죄(赎罪)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양무제가 4
차례 씩이나 사신입사(舍身入寺)한 것만 보아도 양무제(梁武帝)의 불교(佛教)에 대한 경건(敬虔)한 신봉(信奉)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endif]-->
또 양무제(梁武帝)는
중국의 불교승려(佛教僧侶)
들이 사용해 오던 “삼정육(三净肉)”
습관(习惯)을 개변(改变)시켰으며 계주여소(戒酒茹素)를 불교(佛教)의 일대전통(一大传统)으로 만들어 놓았다.
계주여소(戒酒茹素)란?
술을 마시지 않고 소식(素食) 만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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