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7일 월요일

당군당군동정동정과백제백제 투항(투항)

당 나라 군대는 산동반도(山岛)를 출발하여 동해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백제의 군사들은 웅진강(熊津江 : 현재 금강(錦江) 입구)에서 당 나라 군사를 맞아 전투를 시작했는데 애석하게도 패배하고 말았다.

웅진강(熊津江) 작전에서 수 천명의 백제군이 전사하였다.

소정방(定方)이 이끄는 당군(唐军)백제(百济)의 국도(国都) 구발성(俱拔城 : 현재 扶餘)을 공격 할 때 백제(百济)의 국왕(国王) 부여의자(扶余慈)는 난국을 타개 할 국력이 없었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 부여태(扶余泰)不要在家臣面前露出慌的神,快定下次子扶余泰如此提醒父亲." 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아버! 신하들에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마시고 속히 진정하십시요.라는 뜻이다.

의자왕이 신하들의 면전에서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자연적으로 신하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태자( 太子) 부여융(扶余隆)은 ” 父王不如暂时到北方避难吧 “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 잠시 북방으로 피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는 뜻이다.

의자왕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你会跟着我来吗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너 역시 나를 따라오겠지?” 라는 뜻이다.

태자융(太子隆)是的,臣自然奉陪.라고 의자왕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물론이죠! 아버지와 함께 가겠습니다.” 는 뜻이다.

그리하여 의자왕과 태자(太子)는 국도(国都)를 떠나 북방으로 피신하였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 부여태(扶余泰)는 다음과 같이 백제 국민들과 군대들에게 호소하였다.

!我们拼死守住自己的!百勇士!要死守俱拔城,唐军迟撤退的。十五年前,唐曾以大攻打高句,但由于高句死守安市城,唐最后于退兵。我勇士岂会输给高句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국토를 사수해야 합니다. 백제의 용사들은 구발성을 사수해야 합니다. 당군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퇴각 할 것입니다. 15 년 전에 당군이 고구려를 공략할 때 고구려는 안시성(安市城)을 사수하였습니다. 그때 당군은 결국 철병했습니다. 백제의 용사들도 어찌 고구려를 본받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라는 뜻이다.
고구려(高句丽)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였다.

원정군(军)은 본래 군량미의 부족이 제 일 큰 문제인 것이다.

시간이 경과하면 경과 할 수록 수군(军)에게 유리한 것이다.

백제(济)의 전 국민(人民)이 일치단결(一致团结)하여 구발성(俱拔城)을 사수한다면 당군(军)머지않아 철병(撤兵)하고야 말것이다.

당군은 구발성(俱拔城)을 겹겹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태자(太子)의 아들 부여문사(扶余文思)는 도성(都城)을 사수하고 있었으며 태자의 부친(父亲)과 조부(祖父) 의자왕은 도성(都城)을 떠나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국왕(王)과 태자(太子)가 국도(都)를 떠나 백성들을 등지고 떠나 도망가 버릴 경우 백성들의 심리(心里) 상태는 어떠했을까?

그 당시 국도는 부여문사(扶余文思)의 숙부(叔叔) 부여태(扶余泰)가 실제적인 영수(袖)의 신분으로써 군(军)과 민(民)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여태(扶余泰)는 성문(门)을 열고 당군(唐軍)에게 투항해 버렸다.

백제(百济)는 총 37 군(郡)、200 성(城)、76 만호(万户)로 구성된 나라였다.

당 나라는 백제 안에 5 개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통치하였다.

당(唐) 현경(显庆) 五年(서기 660 년)에 백제(百济)는 형식상(形式上) 멸망(亡)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백제(济)와 일본(日本)은 동맹관계(同盟系)에 있었다.

일본서기(日本书纪)에 보면 "서명천황(舒明天皇) 3년(서631 년)에 백제(百济) 왕자(王子) 풍장(丰璋)은 일본에 체류한지 30년이 넘은 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百济) 안에 당(唐) 나라에 대한 저항운동(抵抗运动)하는 유신(臣)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에 체류 중인 왕자(王子)를 모셔 오려고 하였다.

반대운동(反对运动)의 거점(据点)은 금강(江)의 서쪽에 있는 임존성(任存城 : 현재 충남 예산군 大興面 上中里 鳳首山)이었다.

백제(百济) 유신(遗臣) 군단(军团) 총수(总帅)귀실복신(鬼室福信)이라고 불리는 무장(武将)이었다.

귀실복신(鬼室福信)과 도침(道琛)이라고 불리는 스님은 동지가 되어 백제(济)의 부흥(复兴)을 도모하였다.

그들은 사자(使者)를 일본(日本)에 파견하여 왕자(王子) 풍장(丰璋)을 귀국(归国) 조치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일본군(日本軍) 파병(派兵) 요청도 겸하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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