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남북조 시대의 유송(劉宋 : 서기 420 년 - 서기 479 년)의 관계 :
백제(百)는 도읍을 한성(汉城 : 서울)과 웅진(熊津 : 충청남도 公州)과 사비(泗沘 : 충청남도 扶餘)로 세 번 왕성(王城)을 천도하였다.
왕성(王城)을 옮길 때 마다 백제(百济)의 내외(内外) 형세(形势)의 차이는 컸다.
그래서 백제의 조공 정책도 각각 달랐고 조공 회수도 각각 달랐다.
한성(汉城) 시대(时代)의 백제(百济)와 남북조(南北朝)의 조공(朝贡) 관계(关系)는 다음과 같다.
한성(汉城) 시대(时代)의 백제(百济)와 남북조(南北朝)의 조공(朝贡) 관계(关系)는 다음과 같다.
백제(百济)의 한성(汉城) 시대(时代)는 기원 전(公元前) 5 년 에서 부터 시작하여 서기 475 년 까지 였으며 한성시대(汉城时代)의 백제(百济)는 두 개의 한성(漢城)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한성(漢城)은 기원 전 5 년에 한강 이남에 건설된 한성(汉城)이고 또 다른 한성(漢城)은 서기 371 년에 한산성(汉山城)으로 천도한 시기이다.
두 개의 성도(城都)를 모두 한성(汉城)이라고 칭함과 동시에 백제의 한성(漢城)시대라고 부른다. 한다.
백제(百济)는 서기 420 년 부터 서기 475 년 까지 55 년 동안 남북조(南北朝)에 조공(朝贡)을 바쳤다.
한성시대(汉城时代 : 서기 420 년 - 서기 475 년)에 백제(百济)는 여러 방면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북방의 고구려(高句丽) 정권(政权)의 위협을 받았다.
그 당시 고구려(高句丽)는 바야흐로 한창 흥성하였기 때문에 조선반도를 향하여 발전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 당시 고구려의 가장 강력한 적수(敵手)는 백제였다.
고구려(高句丽)의 국토 확장 정책은 백제(百济)와 신라(新罗)에게 크나 큰 위협을 끼쳤다.
고구려(高句丽)의 진공(进攻)을 방어하기 위하여 백제(百济)와 신라(新罗)가 서로 우호통상을 긴밀하게 하였으며 군사동맹(军事同盟) 까지 체결하였다.
고구려(高句丽)와 백제(百济)가 전쟁을 할 경우 항상 백제가 열세에 몰렸다.
한성시대(汉城时代) 후기(后期)에 백제(百济) 개로왕(盖卤王) 때 고구려(高句丽)에서는 스님(僧人)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间谍))으로 파견하여 백제로 하여금 토목(土木) 사업(事業)을 진흥시키라고 꾀어 속였다.
토목사업으로 인하여 백제 국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국력은 소비되어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고구려는 서기 475 년에 백제를 공격하였고 그로 인하여 한성시대(汉城时代)는 종막을 고하였다.
서기 420 년 군신(权臣) 유유(刘裕)가 진(晋)을 멸하고 남조(南朝)는 유송정권(刘宋政权) 통치시대(统治时期)로 넘어갔다.
서기 420 년 군신(权臣) 유유(刘裕)가 진(晋)을 멸하고 남조(南朝)는 유송정권(刘宋政权) 통치시대(统治时期)로 넘어갔다.
유송(刘宋)의 제 3 대 왕 송문제(宋文帝)는 계속(继续) 유유(刘裕)의 정책(政策)을 고수하여 유송정권(刘宋政权)은 출범한지 20여 년 만에 괄목할 만한 번영을 이룩하였으며 사가(史家)들은 이 시기를 원희지치(元嘉之治)라고 일컫는다.
한성시대(汉城时代)의 백제(百济)와 유송(刘宋)의 조공(朝贡) 관계(关系) :
남사-송본기(南史--·宋本纪)에 보면 유송(刘宋) 건립 초기부터 유송(刘宋)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왕(百济王) 부여영(扶馀映)을 진본대장군(镇东大将军)에 책봉하였다.
남사-송본기(南史--·宋本纪)에 보면 유송(刘宋) 건립 초기부터 유송(刘宋)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왕(百济王) 부여영(扶馀映)을 진본대장군(镇东大将军)에 책봉하였다.
송무제(宋武帝) 경평(景平) 2 년(서기 424년) 까지 백제(百济)는 유송(刘宋)에 조공(朝贡)을 바쳤으며 쌍방(双方)은 조공(朝贡) 관계(关系)를 수립하였다.
사적(史籍)에 의하면 그 당시 백제(百济)와 유송(刘宋) 쌍방(双方)은 12 차례 왕래가 있었고 백제(百济)에서는 유송(刘宋)에 10 차례 조공을 바쳤는데 그중 8 차례는 헌물(献物)을 8 차례 하였고 한 차례는 임금을 배알하러 갔으며 또 한 차례는 구제차(求除次) 사신을 파견하였다.
유송(刘宋)은 백제(百济)에 2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중 한 차례는 임금 책봉차 방문하였고 또 한 차례는 위로차(慰劳次) 방문하였다.
유송정권(刘宋政权)에 대한 백제의 조공(朝贡) 활동은 매우 빈번하였다.
백제(百济)의 군신(君臣)들은 유송(刘宋) 황제(皇帝)의 가봉(加封)을 큰 영광으로 알았다.
유송(刘宋) 제 2 대왕 소제(少帝) 경평(景平) 2 년(서기 424년)에 백제(百济)는 사신을 유송(刘宋)에 파견하며 조공을 바쳤다. 그리고 조선반도 내의 정세의 변화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하다.
백제(百济)와 우호적 관계에 있던 우방(友好) 신라(新罗)가 고구려(高句丽)와 우호관계(友好关系)를 수립하였다.
서기 424 년 2 월 에 신라(新罗)와 고구려(高句丽)는 정식 우호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백제(百济)는 고립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제(百济)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수립하여 위급한 상황을 면하려 하였으며 동시에 중원왕조(中原王朝) 유송(劉宋)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유송(劉宋)에 조공을 바쳤다.
서기 425 년 유송의 제 3 대왕 문제(宋文帝)는 백제(百济)에 사신을 파견하여 위로해 주었다.
그후 유송(刘宋)과 백제(百济)의 조공(朝贡) 관계는 온정 상태로 들어가고 백제(百济)는 매년 유송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백제(百济)는 유송의 선진문화를 흡수하게 되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