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高麗王朝)
시기(時期)의 불교
고려(高麗)가 전국을 통일(統一)한 후(後)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불교(佛教)를 신봉하였으며 불탑(佛塔)과 사찰을 건립하였다.
그리하여 불교佛教)가 점차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高麗)
제 11
대(第11代)
임금 문종(文宗
:
서기 1046
년(年)─서기 1083
년(年)의 출가(出家)한 넷째 아들 의천(義天)은 우세승통(祐世僧統)에 봉했으며,
세칭(世稱)
의천승통(義天僧統)이라고도 칭한다.
의천(義天)은 고려(高麗)
선종(宣宗)
2년(서기 1084
년)에 입송(入宋)한 후 송나라의 고승(高僧)
대덕(大德)으로 부터 화엄(華嚴)을 학습하고 천대교의(天臺教義)와 계법(戒法)과 선법(禪法)을 학습한 후 고려로 귀국하여 천대종(天臺宗)이 해동(海東)에서 흥성하지 못함을 개탄하고 숙종(肅宗)
2년(서기 1096년)에
고려(高麗)의 천대종(天臺宗)을 창립(創立)하였다.
고려 제 4
대 국왕 광종(光宗(재위:
949년 ~
975년)은 송악(松嶽)
기슭에
귀법사(歸法寺)를 건립하고 균여(均如)를 주지(主持)로 초청하였다.
균여(均如)는 고려왕조(高麗王朝)
초기(初期)의 화엄학자(華嚴學者)였다.
고려 중기(中期)에 들어서면서 선문(禪門)은 점차적으로 쇠락(衰落)하였다.
그 당시 지눌(知訥)은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고,선종풍(禪宗風)을 천양(闡揚)
함으로써 수 많은 선사(禪師)들이 배출되었고 조계선풍(曹溪禪風)이 재차(再次)
중흥(中興)하게 되었다.
지눌(知訥)은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의 개조(開祖)이다. 지눌은 조계종(曹溪宗)의 종전(宗典)인《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였다. 그후 태고보우(太古普愚)는 입원(入元)하여 옥청공(屋清珙)으로 부터 불법을 학습하고나서 귀국한 후 선문구산(禪門九山)을 일종(一宗)으로 통일시켜 조계종(曹溪宗
또는 선적종(禪寂宗))이라고 칭했다.
천대종(天臺宗)
역시 선종(禪宗)의 일파(-派)이므로 선종(禪宗)에 조계종(曹溪宗)과 천대종(天臺宗)의 양종과 더물어 원융종(圓融宗)을 화엄종(華嚴宗)이라고 개칭하였고,법상종(法相宗)을 자은종(慈恩宗)이라고개칭했으며,법성종(法性宗)을 중도종(中道宗)이라고 개칭하였고 계율종(戒律宗)을 남산종(南山宗)이라고 개칭하였으며,열반종(涅槃宗)을 시흥종(始興宗)이라고 각각 개칭改(稱
)하였다.
후에 "오교이종(五教二宗)"이라고 칭했다.
고려시대 불교(佛教)의 사업 중 가장 큰 사업은
대장경(大藏經)의 출판(出版)이었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2년(서기 1010
년)
"단관기양(丹冠祈禳)이란 구호(口號)
아래 6000여권(余卷)의 대장경(大藏經)을 70여년(餘年)에 걸쳐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서기 1087
년 선종왕(宣宗王)
때 비로소 완성하였으며 대구시(大邱市)에 있는 팔공산(八公山)
부인사(符仁寺)에 보존해 두었다.
고려 고종(高宗)
19년(서기 1232
년)에 몽고병(蒙古兵)들에 의하여 훼손되었다.
고종 23
년(서기 1236
년)
부터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여 16년(年)에 걸쳐 고종 38
년(서기 1251
년)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완성되었다.
《고려장(高麗藏)》이라고도 칭하며 현재 가야산(迦耶山)
해인사(海印寺)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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