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0일 월요일

일본불교(日本佛教)의 발전 역사

일본불교(日本佛教)의   발전 역사

 

일본불교(日本佛教:Japanese Buddhism)는 북전불교(北傳佛教)의 하나이다. 불교는 1400 여년 전에 일본으로 전입되었다.  

초전시기(初傳時期) :

일본(日本) 흠명천왕(欽明天皇) 13서기 552 백제(百濟) 성명왕(聖明王)은  불상(佛像)과 경론(經論)과 번개(幡蓋:기(旗)와 일산(日傘(일산))와 상표권신불법(上表勸信佛法) 등을 일본에 전했다. 이것이 일본 불교(佛教) 전입의 시작이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계체천황(繼體天皇) 16 년(서기 522)에 냥양(南梁)의 사마달(司馬達) 등이 대화국(大和国) 고시군(高市郡)의 반전원(坂田原)에  초당(草堂)을 건립(建立) 하고 불상(佛像)을 안치(安置)한 후 예배(禮拜)를 드렸는데 이것이 일본불교(日本佛教)의 시작이라고 한다사마달(司馬達)은 남양 (南梁) 사람인데 백제로 귀화하여 백제인(百済人)이 되었다.   대화국(大和國 : Yamato State(야마토 국))은  지금의 나라 현(奈良縣)에 해당하며 일본(日本) 고대(古代)의 영제국(令制國)의 하나이다영제국(令制國) 이란율영국(律令国)이라고도 칭하는데 구시(舊時) 일본(日本) 율령제(律令制) 밑에 설치(設置)된 지방행정구획(地方行政區劃)이다.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은 불상(佛像)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으며 다른 나라의 신(神)으로 여기고 숭봉(崇奉)하지 않았다. 백제(百濟)의 불상(佛像) 이 일본(日本)에 전입(傳入)된 후  일본 조정(朝廷)의 귀족(貴族)들 사이에 격렬(激烈)한 쟁론(爭論)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일본 천황(天皇)불상(佛像)을 일본의 대신(大臣) 소아씨(蘇我氏) 숙녜도목(宿禰稻目)에게 試行 건네주며 배(禮拜)를 드려 보라고 권유하였다. 도목(稻目)불상(佛像)을 자기 집안에 안치(安置)해 두고 예배를 드렸다. 후에 그 지역에 역병(疫病)이 유행(流行)하였으며 역병으로 인하여 수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대신(大臣) 물부씨(物部氏)는 불상 때문에 역병이 퍼졌다고 불상(佛像)을 난파(難波 : 현재 대판(大阪)의 굴강(堀江)) 속에 던져버리고 불교(佛教)의 전당(殿堂)을 불살라 버렸다. 소아씨(蘇我氏)와 물부씨(物部氏) 사이에 신앙(信仰) 논쟁(論爭)이 일어났다. 실제(實際)上反映了 황실(皇室)과 소아씨(蘇我氏) 는 대륙(大陸)의 정치제도(政治制度)와 종교문화(宗教文化)를 접수(接受)하자고 주장했으나물부씨(物部氏)와 대반씨(大伴氏)는 대표적인 귀족(貴族) 출신들로써 대륙(大陸)의 정치제도와 종교문화의 접수를 반대하였다.

 

성덕태자(聖德太子)와  일본의 불교(佛教) :

불교(佛教)가 일본(日本)에 유전(流傳)된 후 40이 지나갔다. 일본(日本) 비조시대(飛鳥時代)가 개시(開始)되면서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섭정(攝政)이 시작되었다. 성덕태자는 불교(佛教)를 숭상했기 때문에 귀족(貴族)과 대신(大臣)들에게 불사(佛寺)를 건립하라고 하명하였다. 이때 부터 불교(佛教)는 일본(日本)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추고(推古) 3(서기 594 )백제승(百濟僧) 혜총(慧聰)고구려승(麗僧) 혜자慧(慈)가 일본(日本)으로 들어가서 법흥사(法興寺)에서 불교의 설법을 강해하였다. 성덕태자(聖德太子)는 백제승 혜자(慧慈)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佛教)의 경전을 학습(學習)하였다추고 12 년(서기 603 )성덕태자(聖德太子)헌법(憲法) 17 조(條)를 제정(制定)하였고   제 2 조(2條)는  "독경삼보(篤敬三寶)"에 관한 것인데 다시 말하면 불교를 진심으로 신봉하라는 의미이다성덕태자(聖德太子)의 숭불정책으로 인하여 일본(日本)의 불교(佛教)는 급속도로 유전(流傳)되었으며 흥성하였다. 그리하여  추고(推古) 32 년(서기 623 ) 통계(統計)에 의하면  사찰(刹)의 숫자가 46 군데나 있었고  승려(侶)의 숫자는 816 명에 달했으며  여승(女僧)들의 숫자는  569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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