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2일 일요일

명장(名将) 양호(羊祜)는 전세(前世)의 유물(遗物)을 찾았다

명장(名将) 양호(羊祜)는 전세(前世)의 유물(遗物)을 찾았다



   양호(羊祜 : 서기  221년 ~ 서기 278년)의 자(字)는 숙자(叔子)이고 서진(西晋 : 서기 265 - 서기 316 )의 저명(著名)한 군사가(军事家)이고 정치가(政治家)이며 문학가(文学家)였다.

  

  양호(羊祜)는 박학다식(博学多識)하고 청렴결백(清廉潔白)하며 정직하였다그는 양양(襄阳) 현감으로 재직시 비전투시 주둔병을 농경에 종사시켰으며  맹퇴치에 힘썼고 덕을 쌓고 회유정책(怀柔政策)을 써서 군민(军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 한편으로는 군대를 양성하고 군대의 훈련을 강화시켜 오(: 서기 200 - 서기 280 ) 나라를 멸할 준비를 갖추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동오(东吴)의 명장(名将) 육항(陆抗)이 사망한 후 양호는 임금에게 오(吴) 나라를 침범하여 멸망시키자고 상주(上奏)하였으나  조정의 대신(大臣)들의 반대(反对)로 인하여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기 278 년 함녕(咸宁) 4 에 양호(羊祜)는 신병으로 인하여 낙양(洛阳)으로 돌아와 사망하였다. 임종전(临终前)에 이미 두예(杜预)를 자기 자리에 추천하였다. 후에 두예(杜预)는 오(吴) 나라를 멸하고  통일천하(统一天下)  서진(西晋)을  건국하게 되었는데 양호(羊祜)의 공(功)이 컸다.

  

  양호(羊祜)가 세상을 떠난 후 남주(南州)의 모든 백성(百姓)들은 함께 슬퍼하였다. 양양(襄阳) 사람들은 호(羊祜)가 살아 생전에 자주 올라가 관상하던 양양(襄阳)에 있는 현산(岘山)에 사묘(祀庙)와 비(碑)를 세워주고 사시(四时) 제사(祭祀)를 지내 주었양호의 사묘를 방문하고 비문(碑文)을 읽는 자 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 그래서 얻은 이름이 타루비(堕泪碑)이다.

  

  양호(羊祜)의 유년시절에 있었던 한 가지 기사(奇事)진서(晋书)·양호전(羊祜传)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양호(羊祜)가 다섯 살 된 해에 어느 날 어머니에게 한 개의 금가락지를 내놓으라고 졸라댔다. 양호는 자기 어머니에게 자기(自己)가 전에 가지고 놀던 금가락지(金環)라고 설명했다. 양호는 현재 금가락지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양호의 어머니는 양호(羊祜)에게少爷以前并没有玩过什么金环呀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양호야! 전에 네가 가지고 놀던 금가락지는 없었다.” 는 뜻이다.   

  양호(小羊祜)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갑자기 머리속에 금가락지의 모양이 떠올랐다. 양호는 즉시 이웃집 이씨(李氏) 집의 동쪽편의 낮은 담장 밖에 서있는 뽕나무(桑树) 앞으로 달려갔다. 뽕나무 밑에 있는 작은 굴속에서 금가락지(金环) 한개를 찾아냈다.

  

  그때 이씨(李氏)가 현장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깜짝놀라며  啊呀这只金环就是我几年前死去儿子经常把玩的呀是他丢失掉的当时还因为找不到大哭一场原来是在桑树洞里现在怎么被羊祜拿走了?!라고 양호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얘야! 그 금가락지는 나의 아들이 몇 년 전 죽기전에 가지고 놀던 금가락지인데 그 당시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었다. 나의 아들은 그 금가락지를 잃어버린 후 통곡을 하며 울었었단다. 원래 그 금가락지는 바로 그 뽕나무 밑의 작은 굴속에서 잃어버렸단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그 금가락지를 오늘 찾아냈단 말이냐?” 는 뜻이다.

  

  어린 양호(羊祜)의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이웃집 이씨(李氏)에게 말했다. “내 아들 양호(羊祜)가 금가락지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 온 집안에서 금가락지를 찾고 있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 문 밖으로 뛰어나가 이씨집 담장 옆에 서있는 뽕나무(桑树) 주변에서 금가락지를 찾고 있는데 드디어 양호는 그 금가락지를 찾고 말았다.” 고 설명했다.

  

  이씨(李氏)는 양호의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듣고나서 자기의 죽은 아들이 양호와 비슷하게 생겼음을 알아차리고 슬피 울었으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양양 주위의 원근 각지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나서 매우 신기(神奇)한 사건이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이씨(李氏)의 죽은 아들이 바로 양호(羊祜)의 전신(前身)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 羊祜(公元221年278年),字叔子西晋著名军事家政治家和文学家












晋书·羊祜传》:羊祜五岁时令乳母取所弄金环乳母曰汝先无此物祜即诣邻人李氏东垣桑树中探得之主人惊曰此吾亡儿失物也云何持去乳母具言之李氏悲惋时人异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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