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2일 목요일
명의(名醫) 루영(樓英 : 서기 1332 년 ~ 서기 1401 년)
명의(名醫) 루영(樓英 : 서기 1332 년 ~ 서기 1401 년)
루영(樓英:1332~1401)의 이름은 공상(公爽)이고 자(字)는 전선(全善)이며 호(號)는 전재(全齋)이고 절강성 소산(蕭山)의 루탑(樓塔) 태생이다. 오월왕(吳越王) 전류(錢鏐) 휘하의 대장(大將) 루진(樓晉)의 후예(後裔)이다.
그는 어려서 부터 총명하여 4 세(歲) 때 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7 세(歲) 때 《내경(內經)》을 읽었으며 12 세(歲) 때 《사서(四書)》를 강론하였다. 루영이 17 세(歲) 되던 해에 모친(母親)이 병에 걸렸을 때 루영은 손수 탕약(湯藥)을 달여 모친(母親)에게 복용시켰으며 모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수발을 하였다. 루영의 효심(孝心)은 인근 향리(鄉里)에 까지 퍼졌다.
모친(母親)의 환병시(患病時) 루영의 부친은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의 하나인 주단계(朱丹溪)의 수제자 포강(浦江) 명의(名醫) 대원례(戴原禮)를 세 차례나 초청하여 루영의 모친을 치료케 하였다.
루영(樓英)은 대원례(戴氏)의 고명(高明)한 의술(醫術)에 탄복하였다. 루영은 그때 부터 행의제세(行醫濟世)에 대한 꿈을 마음속에 지니기 시작하였다. 그후 루영은 대씨(戴氏)를 여러 차례 만나 그의 고명한 의술(醫術)과 의리(醫理)를 배웠다.
그러나 루영의 부친 루영(樓泳)은 자기 아들이 의사가 되는 것을 싫어하였다. 루영의 부친은 자기 아들 루영에게 《사서(四書)》와《오경(五經)》을 탐독하게 하여 부귀공명(富貴功名)을 얻고 조상들에게 영광을 돌려 드려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원말명초(元末明初)에 루영은 부친에게 :「行醫治病,惠及黎民,豈不勝於為官?」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의사가 되어 질병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어찌 고관대작들 보다 못하단 말씀입니까?” 란 뜻이다.
그리고 나서 루영은 「不為良相,寧為良醫」을 지향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훌륭한 재상이 되지 않으려거든 훌륭한 의사가 되어라.”는 뜻이다.
루영은 20 세(歲) 때 부터 의서(醫書)를 탐독하며 한 편으로는 향촌(鄉村)으로 돌아다니며 민간행의(民間行醫)를 하였다. 루영은 손수 채약(採藥)하여 탕약(湯藥)과 환약(丸藥)을 만들었다. 그는 소(蘇:강소성)와 절(浙:절강성)과 환(皖:안휘성)과 악(鄂:호북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행의(行醫)하였다.
루영의 고향 루탑(樓塔)에 전해 내려 오는 다음과 같은 전설(傳說)이 있다. : " 某日,樓塔村一名孕婦死於難產,出喪時卻遇樓英回家,見棺木內有鮮血流出,急呼停留,開棺診視後,一針下去,嬰兒叫喊出世,後母子平安。此等病例較多,聲名遠播,傳至朝廷。明洪武十年(1377),明太祖朱元璋正在患病之時,召民間名醫,46歲的樓英經臨淮(今安徽鳳陽一帶)縣丞孟恪推薦,去京都(南京)給明太祖朱元璋治病,明太祖病癒後,見他醫術高明,非常賞識他,命他留在京都太醫院任職。而樓英不願與官府應酬,卻以年老體弱多病為由,上表謝辭,這年八月,明太祖下詔「賜歸」。樓英回到民間後,一邊繼續從醫、一邊著書。”
다시 말하면 ”어느 날 루탑촌(樓塔村)의 임부가 난산(難產)으로 사망하였다. 루영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도중에 임부의 출상(出喪)이 진행되고 있었다. 루영은 널 안에서 붉은 색깔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루영은 출상을 멈추라고 말한 후 널을 열어 사망한 임부에게 침을 한 대 놓았다. 이윽고 영아(嬰兒)의 울음소리가 나며 귀여운 옥동자가 태어났다. 산모와 영아(嬰兒)는 무사하였다. 이와같은 소문이 원근 각지로 퍼져 조정(朝廷)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명 나라 홍무(洪武) 10 년(서기 1377 년)에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중병에 걸려 민간명의를 찾고 있었다. 임회(臨淮) 현승(縣丞:지금의 군수) 맹각(孟恪)은 그 당시 46 세의 루영을 남경(南京)으로 보내며 주원장(朱元璋)의 병을 치료하라고 명했다. 루영의 치료를 받고 주원장의 중병이 치유되었다. 주원장(朱元璋)은 루영을 즉시 경도(京都) 태의원(太醫院)에 임직(任職)하였다. 루영은 태의원 어의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에 병이 있고 노약하다고 핑게를 대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명태조는 루영의 사표를 수리해 주었다. 그후 루영은 고향으로 돌아와 행의하는 한편 저서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는 뜻이다.
루영(樓英)은 30 여 년간 풍부(豐富)한 의학경험(醫學經驗)을 쌓고나서 홍무(洪武) 29 년(서기 1396 년)에 《의학강목(醫學綱目)》 40 권(卷)을 저술하였다. 의학강목은 중국 의학사상(醫學史上) 보기 드문 걸작(傑作)이다.
명(明) 나라의 저명(著名)한 의학가(醫學家) 이시진(李時珍)이《본초강목(本草綱目)》을 편찬 할 때 《의학강목(醫學綱目)》을 주요(主要) 참고서(參考書)로 사용하였다.
루영(樓英)은 스스로 산(山)에 올라가서 채약(採藥)하고 종약(種藥)하였으며 제약(製藥)하였다. 그는 인도주의적(人道主義的) 치병정신(治病精神)이 투철했으며 빈곤(貧困)한 환자들로 부터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그는 빈부귀천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위로는 조정(朝廷) 안의 황친국척(皇親國戚)과 아래로는 빈민백성(貧民百姓)에 이르기 까지 성심성의껏 치료에 임하였다.
그 당시 (當時) 백성들은 루영(樓英)을「신선태공(神仙太公)」이라고 칭했다. 루영(樓英)은 의학(醫學) 외에도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와 역법(曆法)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루영은 만년(晚年)에 선암산(仙岩山)과 운문사(雲門寺) 등지에 은거(隱居)하며 저술(著述)에만 전심전력(專心專力)하여 《의학강목(醫學綱目)》 40 권(卷)과 《내경운기유주(內經運氣類注)》 4 권(卷)과 《주역삼동계약물화후도설(周易參同契藥物火候圖說)》과 《선암문집(仙岩文集)》 2 권(卷)과 《강조론(江潮論)》과 《수분설(守分說)》과 《선암일록잡효(仙岩日錄雜效)》와 《정전록(正傳錄)》 등을 저술하였다.
루영의 묘장(墓葬)은 현재 루탑진(樓塔鎮) 오주탕산(烏珠盪山) 기슭에 안장되어 보존(保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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