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2일 토요일
구병성의(久病成医) 황보밀(皇普谧)
구병성의(久病成医) 황보밀(皇普谧)
랑자회두(浪子回头)란? 방탕한 자식의 개심(改心)을 일컫는데 역사를 도리켜 보면 불량 소년들이 훌륭한 인재가 된 고사는 허다하다. 진(晋) 나라 때 대의학가(大医学家) 황보밀(皇甫谧)이 그러한 인물이다. 서기 215 년(年) 한(汉) 나라 헌제(献帝) 건안(建安) 20 년에 황보밀(皇甫谧)은 고고의 성을 울리며 세상에 태어났다. 황보밀의 모친(母亲)은 산후(产后) 대출혈(大出血)로 인하여 황보밀을 분만하자 마자 즉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황보밀의 아버지는 무위도식하는 사람임으로 도저히 황보밀을 부양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황보밀은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 숙부의 집은 그래도 생활 형편이 넉넉한 편이었다. 황보밀(皇甫谧)은 어린 시절에 의식(衣食) 걱정은 하지 않고 자랐으며 하는 일 없이 매일 빈둥거리며 놀기 만 하였다. 황보밀이 20 세(岁) 때 되던 어느 날 할 일 없이 산야(山野)로 한가로이 돌아다니다가 사과를 한 개 따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숙모에게 주었다. 숙모(叔母)는 “汝今年余二十,目不存教,心不入道,无以慰我。”라고 황보밀에게 말하며 화를 벌컥냈다. 다시 말하면 ”너는 금년에 스무 살 임에도 불구하고 공부는 전혀 할 생각이 없고 도를 닦을 맘도 없는데 나를 위로할 길이 전혀 없는 것 같구나!” 는 뜻이다. 숙모의 말을 듣자마자 황보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나왔다. 황보밀(皇甫谧) 크게 깨우치고 나서 경서(经书)와 사적(史籍)과 제자백가(诸子百家)들의 저작(著作)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황보밀은 의학서적 저작(著作)에 힘썼다.
황보밀(皇甫谧)은 42 세(岁) 때 풍비증(风痹证)에 걸렸다. 현대(现代)의 “통풍병(痛风病)인데 쌍각동통(双脚疼痛)으로 인하여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그는 한 편으로 침구의학(针灸医学) 문헌(文献)을 수집하여 탐독하였고 또 한 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병을 치료하였다. 결국 황보밀은 《황제삼부침구갑을경(黄帝三部针灸甲乙经)》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침구이론(针灸理论) 체계(体系)의 완성이었다. 《황제삼부침구갑을경黄帝三部针灸甲乙经》은 《침구갑을경针灸甲乙经》또는 《갑을경甲乙经》이라고 칭한다. 《침구갑을경针灸甲乙经》은 침구학(针灸学) 발전(发展)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唐) 나라 때 태의서(太医署)에서 침구학(针灸学) 교재(教材)로 사용되었으며 후에 일본(日本)과 조선(朝鲜) 등 여러 나라에 유전되었고 현재 까지 국제적 명성이 높다. 위진시대(魏晋时代)에“오석산五石散”이 유행했었는데 황보밀(皇甫谧)은 오석산을 복용(服用)한 후 흉복조열(胸腹燥热)과 번민해역(烦闷咳逆)으로 인하여 의복을 착용하지 못하고 냉수 만 마시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자살까지 하려고 결심하였다. 황보밀(皇甫谧)은 오석산의 약독(药毒)을 해제(解除)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경주하여 자기병을 치유하였다. 황보밀(皇甫谧)은 그 당시 평양(平阳) 태수(太守) 유태(刘泰)의 오석산 중독을 치유해 주었다. 황보밀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통한 오석산 중독 치료 방법을 종합하여 논한식산방(论寒食散方)을 저술하였다.
그때 부터 민간(民间)에 “구병성의(久病成医)” 란 속어가 생겼다. 다시 말하면 ”어떤 병을 오랫동안 앓고 나면 자기 자신의 질병(疾病)에 관한 지식(知识)이 생겨 명의가 된다.” 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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