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5일 목요일

제 일위(第一位) 여국의(女国医) 의작(义妁)

제 일위(第一位) 여국의(女国医) 의작(义妁) 한무제(汉武帝 : BC 140 - BC 87) 때 의작(义妁)의 부모(父母)는 그 당시 태의원(太医院) 최고장관(最高长官) 태의령승(太医令丞) 최부지(崔府志)의 모함으로 인하여 함께 죽었다. 일시에 천애의 고아가된 의작(义妁)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아버지의 친한 친구요 민간의사(民间醫師)인 허선(许善)의 집으로 들어가 양육(養育)되었다. 의작(义妁)은 천자총명(天资聪敏)하였으며 의술에 정진하여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 그녀의 희망이었다. 양부(养父)로 부터 의술(医术)을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부(养父)는 그 당시 창궐한 온역(瘟疫)으로 사망하였다. 천만다행으로 장안(长安)의 제 일 명의(第一名医) 정무공(郑无空)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의작은 열심히 의술을 연마한 덕택으로 여의사 중 편작(扁鹊)으로 이름을 날렸다. 의작의 의술(医术)이 고명하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한무제는 의작을 궁정(宫廷)으로 불러들였다. 얼마 후에 의작은 궁중 내의 파벌 싸움에 휘말려 심한 박해(迫害)를 받고 투옥되었다. 의작은 출옥 후에 유의(乳医)와 여의(女医)를 거쳐 여시의(女侍医)에 임명되었고 결국 의작의 의술을 인정한 한무제(汉武帝)는 의작을 서한(西汉) 역사상(历史上) 제 일위(第一位) 여국의(女国医)에 책봉(册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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