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 나라 현종(玄宗)은 백발(白髮) 치료의 고수(高手) :
당(唐) 나라 제 10 대왕 현종(玄宗 : 서기 712년 - 서기 756년)은 《괴뢰음(傀儡吟)》이란 시를 한 수 읊었다. 시(詩) 중에 “刻木牵丝作老翁,鸡皮鹤发与真同。” 란 구절이 있다. 다시 말하면 계피학발(鸡皮鹤发)이란 피부(皮肤)에 주름쌀이 있고 두발(头发)이 창백(苍白)함을 묘사(描写)한 구절이며 노인을 형용(形容)한 구절이다. 만년(晚年)에 당현종(唐玄宗)은 도교(道敎)를 숭상했으며 도교의 장생불노(长生不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현종은 계피학발(鸡皮鹤发)에 반감(反感)을 가졌다. 계피학발이란? 피부는 닭살과 같이 쭈글 쭈글하고 머리카락은 온통 백발이 되어있음을 형용한 말이다. 특히 양귀비를 입궁(入宫)시킨 후 부터 매일 백발의 숫자가 더욱 증가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양귀비(楊贵妃)를 어린풀잎(嫩草)으로 묘사하였고 당현종을 늙은소(老牛)로 묘사하였다. 당(唐) 나라 제 10대왕 현종(玄宗 : 712년-756년) 이융기(李隆基 : 서기 685년 - 서기 762년)는 당(唐) 나라 황제들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황제(皇帝)이다.
개원(开元) 23년(서기 735년)에 양귀비는 17세이었고 현종(玄宗)은 51세였다. 현종의 머리카락은 반백(半白)이었고 계피학발(鸡皮鹤发) 정도(程度)는 아니었다는데 양쪽 살쩍에 하얀 백발(白髮)이 출현되었다. 당현종은 이때 부터 백발(白髮)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현종의 머리 속에 신선(神仙) 장과노(张果老)를 떠올리기 시작하였다.
《명황잡록(明皇杂录)》에 장과노(张果老)의 본명(本名)은 장과(张果)이며 일개도사(一個道士)인데 나이는 수 백살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현종(玄宗)은 장과를 흠모(羡慕)하였다.
장과(张果)의 쇠발변청빈(衰髮变青鬓) 비방(秘方)은 《명황잡록(明皇杂录)》에 기재되어 있지 않고 당(唐) 나라 대중(大中) 9 년에 저술된《현해록(悬解录)》에 기재되어 있다. 장과(张果)가 현종(玄宗)에게 진상(进上)한 《수선오자환방(守仙五子丸方)》은 “종자(种子 : 씨받이)” 를 조양(调养)해 줄 뿐만아니라 백발(白发)을 치료해 준다. 여감자(余甘子 : 암라)、복분자(覆盆子)、토사자(菟丝子)、오미자(五味子)、차전자(车前子)로 조성되어 있으며 오장(五脏)의 기능을 증진시켜 주고혈육(血肉)을 윤택(润泽)하게 해주며 만독(万毒)을 제거시켜 주고 머리카락을 칠(漆)과 같이 검게해 주며 반노환동(返老還童)해 준다. 현해록에 다음과 같은 장과(张果)의 《오자수선환가(五子守仙丸歌)》가 수록되어 있다. :返老成少是还丹,不得守仙亦大难,愁见鬓斑令却黑,一日但服三十丸。松竹本自无焰故,金液因从火制干,五子可定千秋旨,百岁如同一万年。“ 한의학에서 "肾髮发相通,精虚血弱,肾精不足,血热偏盛,情绪激动,都会滋生白发。“ 이라고 말한다. 오자환(五子丸)은 장신(壮肾) 작용이 있으므로 백발(白髮)을 치료해 준다. 현종(玄宗)에게 적합한 처방이다. 현종(玄宗)은 50세 부터 자기(自己) 백두발(白头发)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오자환(五子丸)”은 현종(玄宗) 자신(自身)이 몸소 실험(实验)한 처방이다. 천보(天宝) 4년(서기 745년)에 당현종(唐玄宗)은 60세이었다. 그당시 27세의 양옥환(杨玉环 : 서기 719년 -서기 756년)의 호(号)는 태진(太真)이며 당(唐) 나라 때 궁정음악가(宫廷音乐家)、무용가(舞踊家)이었고 정식(正式) 귀비(贵妃)로 책봉(册封)되었다. 그녀의 음악(音乐)은 역대(历代) 후비(后妃) 중 으뜸이었으며 후세인들은 그녀를 중국(中国) 고대(古代) 4 대미녀(四大美女) 중 하나라고 칭했다. 고인들의 속언(俗言)에 “노부소처(老夫少妻)” 란 말이 있는데 당현종의 현실로 나타났다. 양옥환을 정식귀비로 마지한 후 부터 현종(玄宗)의 신기(肾气)는 날로 쇠약해 짐과 동시에 백발(白髮)의 숫자는 점점 증가되어 할아버지 모습으로 변했다. 현종은 백발 때문에 스트레스트를 많이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현종은 도교계(道教界)의 고수(高手)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으며 고대로 부터 민간(民间)에 전해 내려오는 고방(古方)을 수집(收集)하였다. 수 많은 보신(补肾) 처방과 백발(白髮)을 치료해 주는 영단묘방(灵丹妙方)을 얻었다. 궁중(宫中)에 비장(秘藏)해 두고 수시로 복용하였다. 현종(玄宗)은 총애하는 대신(大臣)들과 함께 복용함으로써 강신발흑(肾强发黑)의 효과와 청춘영주(青春永驻)의 효과를 검증하였다. 개원연간(开元年间: 서기 713 년 - 서기 741년)에 경조부(京兆府) 삼원현(三原县)의 현위(县尉) 진장기(陈藏器)는 《본초습유(本草拾遗)》를 저작했는데 그속에 :여감자(余甘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梵书名庵摩勒,又名摩勒落迦果。其味初食苦涩,良久更甘,故曰馀甘。”又说,此方“生发,去风痒,令发生如漆黑也。” 다시 말하면 “여감자의 범서명은 암마륵 또는 마륵락가과이고 그 맛은 처음엔 쓰고 떫으나 오래 씹을 경우 단맛이 생긴다. 그리하여 여감(馀甘 : 단맛의 여운이 있음) 이라고도 칭하는데 머리카락을 새로 돋아나게 해줌과 동시에 머리카락을 칠흑 처럼 검게해 주며 풍양을 치료해 준다.” 는 뜻이다. 당 나라 때 여감자(馀甘子:indian gooseberry)는 백발(白髮)의 치료약으로 민간(民间)에 대유행(大流行)되었다. 장과(张果)가 현종에게 진상한 “오자환(五子丸)” 속에 여감자가 포함되어 있다. 명(明) 나라 때 이시진(李时珍)의《본초강목(本草纲目)》에 오자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상세(详细)히 기록되어 있다. :“取馀甘子压汁,和黑芝麻油调匀,涂头,搽发。主治白发,头皮痒,脱发。” 다시 말하면 ;‘여감자의 즙을 내어 흑지마유(검정참깨 기름)와 혼합하여 머리와 머리카락에 발라주면 백발과 탈발과 두피양(头皮痒)이 치료된다." 는 뜻이다. 그 당시 당현종(唐玄宗)은 치백발(治白发)의 고수(高手)라고 소문이 났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머리염색약 중에 "현종패흑발제(玄宗牌黑髮剂)" 란 이름을 가진 머리염색약이 판매되고 있다.
원문(原文): 唐玄宗是治白发的业余高手?
唐玄宗写过一首《傀儡吟》,其中有两句“刻木牵丝作老翁,鸡皮鹤发与真同。”鸡皮鹤发一词就成了描写皮肤发皱、头发苍白、形容老人年迈的成语。晚年的唐玄宗好道,喜欢的是长生不老,所以他对鸡皮鹤发很反感,尤其是杨玉环入宫后,他愈来愈憎恨头上的每一根白发,从内心总怕别人把贵妃比嫩草、把自己比老牛。
开元二十三年(公元735年),杨玉环被册封为李瑁妃,这一年,玉环十七岁,玄宗五十一。年过半百的玄宗虽然还没有达到鸡皮鹤发的危险程度,也没有霸占玉环的贼心,但他的两鬓已出现根根白发。这一年,他会见了一个关键人物,从此萌发了根除白发的念头,这个人就是传说中的神仙张果老。
据《明皇杂录》载,张果老本名张果,是个道士,自吹已活数百岁,玄宗羡慕,遍寻招见。玄宗曾经问他:“先生得道者,何齿发之衰耶?”张果于是御前拔去鬓发,击落牙齿,流血溢口,俄顷,青鬓皓齿,愈於壮年。张果玩的什么魔术不得而知,不过,衰发变青鬓倒是击中了玄宗的软处。玄宗相信,几百岁的老人尚且如此,何况自己才五十一,何愁没有一头潇洒的黑发?
张果衰发变青鬓的秘方,《明皇杂录》没有记载,号称著于唐大中九年的《悬解录》一书倒是说,张果曾向玄宗进上《守仙五子丸方》,不仅能调养“种子”,还能治疗白发。此方用余甘子、覆盆子、菟丝子、五味子、车前子配制,能通流于五脏,润泽血肉,万毒悉除,髭鬓如漆,返老成少。书中附了张果的《五子守仙丸歌》:返老成少是还丹,不得守仙亦大难,愁见鬓斑令却黑,一日但服三十丸。松竹本自无焰故,金液因从火制干,五子可定千秋旨,百岁如同一万年。
从中医的角度看,肾发相通,精虚血弱,肾精不足,血热偏盛,情绪激动,都会滋生白发。“五子丸”能壮肾而去白发,这很适合当时玄宗的个人状况,也很有道理。如果此方属实,玄宗当是年过五十时,就开始治疗自己的白头发了。不过,《悬解录》只有成书时间,没有署名作者,记载“五子丸”的研制过程也充满了浓厚的传说色彩,仅凭一家之言,就说玄宗以自身作实验,掌握了治白发的临床实战经验,说服力显然不足。
天宝四载(745),唐玄宗已过六十,二十七岁的杨玉环被正式册封为贵妃。老夫少妻的现实,让玄宗的肾越来越不争气,白发也日渐变多,他感到了空前的压力,通过向道教界的高手求助和向民间广泛征集,收集了不少补肾和治白发的灵丹妙方。然后,秘藏宫中,以备已用。通过自身检验行之有效的秘方,玄宗也会向宠爱的大臣推荐,以便让宠爱的大臣和自己一样,肾强发黑,青春永驻。
天宝年间,有个胡人红得发紫,这人就是安禄山。天宝六载(747年),安禄山年龄正处奔五,正式认贵妃为干娘,其年龄悬殊在一十八岁。从此,安禄山以侍奉干娘为名,随意进入禁中,与贵妃对食,通宵达旦,外面流传不少丑闻。作为干爹的唐玄宗不以为然,他看到安禄山对干娘如此孝敬,倍加宠待。不过,当他看到干儿子头上的白发时,总是觉得这个干儿子与他干娘相比,有点老。为了也让干儿子嫩一点,他决定拿出自己珍藏的秘方,给他治治白发。
唐代段成式《酉阳杂俎》记载了唐玄宗赏赐安禄山的实物清单,其中有“余甘煎”汤剂。和清单中的“野猪鲜、鲫鱼并鲙手刀子、清酒、辽泽野鸡”等实物相比,猛一看,这好像也是一道美味佳肴,但仔细深究才发现,这本是一幅治疗白发的好方子。
开元年间,京兆府三原县有个县尉叫陈藏器,此人汇集前人遗漏药物,著有《本草拾遗》一书,其中记载:余甘子“梵书名庵摩勒,又名摩勒落迦果。其味初食苦涩,良久更甘,故曰馀甘。”又说,此方“生发,去风痒,令发生如漆黑也。”如此看来,用馀甘子治疗白发,当时民间颇为流行,张果所进“五子丸”也含有此成分,而唐玄宗送给安禄山的这幅汤剂,只不过到了禁中又进行了再加工,使之功效更好,取名“余甘煎”。
明代李时珍在《本草纲目》详细记录了此方:“取馀甘子压汁,和黑芝麻油调匀,涂头,搽发。主治白发,头皮痒,脱发。”这么好的一个方子,如果不是唐玄宗亲自试过功效好,他会送给心爱的干儿子吗?如果不送,和玄宗朝夕相处的杨贵妃肯定不答应。安禄山承主龙恩,相信在家会经常用此药染发,而他造反时,头发一定是乌黑发亮的。
由此看,唐玄宗会治白发,当是不争事实,不过,以上所说仅能证明他藏有秘方并推荐别人使用,美中不足的是没有真正的临床效果,还不足以说明玄宗是个治白发的高手。俗话说,不看广告看疗效。要证明玄宗是治白发的高手,必须有一个治好白发的人站出来说:玄宗牌黑发剂,谁用谁知道。
天宝年间除了安禄山,还有一个走红政坛的汉人,这人就是李林甫。他为人忌刻阴险,时人称他“口有蜜,腹有剑”。李林甫当宰相最大的特点,就是排挤贤良,抬高自己,张九龄、裴耀卿、李适之等人都是在他的排挤下罢相。爱算计人的人,总是比被算计的人多操心,他头上的白发也不少。唐玄宗当时以为他操劳国是所生,很是心疼,就经常赏赐他一种叫“甘露羹”的药膳,用于治疗白发。林甫一用,效果果然很好。
李林甫的女婿叫郑平,就任户部员外郎,曾经与林甫同在一处。有一天,李林甫碰到郑平梳洗头发,见他鬓发皆白,就把玄宗赐食的“甘露羹”端给了郑平吃。奇迹第二天出现了,郑平的白发竟然一夜变黑。这个故事出自宋代《太平御览》和《海录碎事》两本书,而这两本书都是引自《明皇杂录》,因为《明皇杂录》真本早已失传,后人整理再版时,作为逸文补入其中。
宋代的两本书在记载“甘露羹”疗效时,只有细微之差,《御览》说是“一旦发毛如黳”,而《海录碎事》则说“一夕鬓如黳”。黳(yī)的意思是黑,无论是旦还是夕,总之都是十二小时。如此说来,唐玄宗的这碗羹可真是疗效神奇,因为从古至今,喝一碗羹就能让白发消失如此之快的,实属罕见。这一病例有力地证明,说玄宗是一手握秘方的治白发高手,实不为过。
可惜的是,唐玄宗一直对“甘露羹”的配制秘藏宫中,没有轻易对外泄露,以致古书没有作出记载,这也给后人留下无限想像的空间。有人曾根据玄宗的食谱用何首乌、鹿血、鹿筋熬制成汤,冠名“甘露羹”,可始终没有人达到十二小时让白发变黑的疗效,这实在是一个不小的遗憾。
无论怎么说,唐玄宗自治白发,应该属实,帮人治病,无可厚菲,可作为皇帝中治疗白发的业余高手,看看他治疗过的病号,一个谋反,一个奸佞,全是为人不齿的鸟人。如此说来,治疗白发和选人用人并无本质上的区别,选对了病号,他会感恩,选错了患者,他会咬你,这令人想起了“农夫和蛇”的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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