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3일 화요일

왕양명(王陽明 )의 환생(還生)

() 나라 때 왕양명(王陽明 : 서기 1473 서기 1529 )은 대철학가였으며 이름은 수인(守人)이고 자()는 백안(伯安)이며 호()는 양명(陽明)이다. 절강성 여요(餘姚縣 : 지금 紹興) 사람이다.

왕양명은 처음엔 불교에 몰두하다가 35세부터 유교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왕문성공전집(王文成公全集)과전습록(傳習錄)이 있다.

왕양명은 학문이 심오하고 덕망이 있어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왕양명이 50세 되던 해 강소성 진강(鎭江)에 있는 금산사(金山寺)를 참관(參觀)했다. 금산사에 며칠 묵고 있었다.

그 당시 금산사의 법사(法師)는 왕양명의 시중을 들어 주었다.

법사는 왕양명에게 절안에 있는 모든 건물 안에 대부부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으나 오직 한 군데 만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50년 전에 그 방에 살던 노화상이 그 방안에서 원적(圓寂)하였기 때문이며 그 노화상의 육신이 지금까지 썩지않고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대로 그 노화상의 육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고 설명했다.

왕양명은 법사의 말을 듣고나서 더욱 더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왕양명은 법사에게 애걸복걸 하며 그 방안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법사는 왕선생의 학문과 도덕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편의를 도모하여 방문을 열고 구경하라고 허락하였다.

왕양명이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노화상은 50 년 전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스님들이 좌선할 때 깔고 앉는 부들 방석위에 단정하게 앉아서 편안하게 죽었다.

왕양명이 노화상의 얼굴을 쳐다보니 과거에 알고 지냈던 사람의 얼굴 처럼 낮이 익었다. 머리를 쳐들어 벽을 쳐다보니 50년 전 원적시에 써놓은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오십년후왕양명(五十年後王陽明), 개문유시폐문인(開門猶是閉門人),
정령거후환귀복(精靈去後還歸復), 시신선문불괴신(始信禪門不壞身).”

다시 말하면 ”50년 후에 왕양명이 이 방문을 열것인데 그 사람은 바로 50년 전에 이 방문을 닫은 사람이다. 정령이 떠난 후 다시 복귀하였다. 처음에 부처님을 열심히 믿었기에 육체가 썩지 않았음이라!” 는 뜻이다.

노화상은 현재, 과거, 미래를 모두 알고 있었다. 일찍이 50 년 후의 일도 알고 있었으며 노화상 자신의 영혼이 모태 속에 들어가 왕양명으로 환생하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노화상이 죽은지 50 년 후에 왕양명이 이 문을 열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50 년 후에 이 방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50년 전에 이 문을 닫고 죽은 사람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노화상의 시()는 정령이 다시 복귀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영혼이 신체를 떠난 후 다시 복귀되었다. 노화상은 죽은지 50 년 후에 자신의 전세의 육신을 보게된 것이다. 왜냐하면 노화상은 전세에 수행을 잘한 결과 래세에 왕양명으로 환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세에 왕양명으로 환생하였으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만일 노화상이 살아 생전에 소원하고 부처님께 소망을 빌고 염불하고 독경하고 극락세계를 구했더라면 노화상의 수행으로 인하여 내세에 윤회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며 다시 왕양명으로 환생하지 않했을 것이다. 이상의 역사 고사는 후세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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