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멸친(大義滅親)
석작(石碏)은 춘추시대 위(衛) 나라의 대신(大臣)이었다.
위 나라 장공(庄公)의 애첩에서 태어난 아들 주우(州吁)는 무술을 좋아하였으며 장공(庄公)의 총애를 받고 자랐다. 주우(州吁)는 제멋대로 자란 아이였다.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간언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우(州吁)와 석작(石碏)의 아들 석후(石厚)는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로써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우(州吁)는 석후(石厚)의 말을 전혀 듣지않고 결국 위환공 16 년(서기 전 719 년)에 주우는 환공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에 올랐다.
대신들과 백성들의 불만이 컸다. 그래서 석후(石厚)는 자기 아버지 석작에게 정국의 안정을 찾을 길을 알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석작(石碏)은 아들에게 거짓으로 주우(州吁)를 모시고 주나라 천자를 참배하러 가라고 부탁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모든 제후국들은 주나라의 영향력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석작(石碏)은 자기 아들 석후(石厚)와 주우(州吁)가 주나라 천자를 참배하러 가기 위하여 진(陳) 나라를 통과할 때 진나라 군사들에 청하여 두 사람을 모두 가두어 놓으라고 부탁하였다.
석작(石碏)은 신하를 파견하여 주우(州吁)는 복(濮 : 현재 安徽省 毫縣의 동남쪽)에서 죽이고 자기의 친아들은 진나라에서 죽였다.
그 당시 석작은 대의멸친(大義滅親)하였다.
대의멸친(大義滅親)이란?
“국가의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부모형제를 돌보지 않은다.” 는 뜻이다.
춘추시대 (春秋时代) 사학가(史学家) 좌구명(左丘明)은 석작(石碏)에 대하여: “石碏为大义而灭亲,真纯臣也!” 라고 기록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대의를 위하여 친 아들을 살해한 석작이야 말로 진실한 신하였다.” 는 뜻이다.
서주(西周: 서기 전1088년 – 서기 전 771년) 초년 주무왕(姬發) 때 대분봉(大分封)이 실시되었다. 그때 주무왕은 자기 친 동생 강숙(姬封)을 위(衛)에봉했다. 위나라의 도읍은 조가(朝歌 : 현재 하남성 (河南省) 기현(淇县) 西南)였다.
강숙의6세손위정백(衛靖伯)의 손자 공손작(公孫碏: 자(字)는 석(石))이 있었는데 석작이라고도 불렀다.
공손자란? 성씨가 공손이 아니라 손자라는 뜻이며 공손자의 원래 이름은 희작(姬碏)이다.
석작(石碏)은 석씨(石氏)의 시조이다.
위 나라의 장공의 애첩 소생 주우는 무술을 좋아하였고 싸움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장공은 주우를 장군에 임명하였다.
석작(石碏)은 장공에게 ”서자(庶子)가 호전적이고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장차 난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고 간언하였으나 장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장공이 죽고 난 후 태자 완(完)이 왕위를 계승하여 환공(桓公)이 되었다. 환공이 왕위에 오른 그 다음해에 주우가 너무나 거만하고 횡포하며 사치가 심하여 대신들의 불평이 많아서 장군 직위를 박탈해 버렸다.
그 결과 주우(州吁)는 다른 이웃 제후국으로 도주해 버렸다.
10여 년 후 주우(州吁)는 군대를 이끌고 몰래 위국으로 잠입하였다. 주우(州吁)는 자기의 심복 석후와 밀모한 후 주(周) 나라 항왕(恒王) 원년(元年 : 서기 전 719 년) 제 1 차 연회 석상에서 위나라 환공을 살해나고 나서 스스로 위나라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석후(石厚)의 아버지 석작(石碏)을 사대부(士大夫)의 자리에 위임시켰다.
주우(州吁)가 불법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대신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주우(州吁)는 자기 심복 석후(石厚)를 석작(石碏)에게 보내어 자문을 청했다.
석작(石碏)은 거짓으로 ”만일 주우(州吁)가 자기의 왕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천자(周天子)를 접견해야 한다.” 고 말했다.
석후(石厚)는 아버지에게 ”이와 같은 상황에서 주천자 접견이 가능하겠습니까?” 고 물었다.
살해 당한 위환공(衛桓公)의 어머니가 진나라 사람이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위환공의 살해에 대해서 원한을 품고 있다. 그래서 주우(州吁)를 없애 버리는 일은 아주 쉬울 것으로 상상하였다.
그리하여 석작(石碏)은 자기 아들 석후(石厚)에게 ”현재 진왕과 주천자는 친분이 매우 두터운 사이이다. 위국과의 관계는 매우 좋으니 염려할 것 없다. 만일 주우(州吁)가 친히 진나라를 방문할 경우 진나라와 위나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것을 주천왕이 알게 됨으로써 주천자와의 접견은 문제되지 않을 것 같다.” 고 말했다.
주우(州吁)는 석작(石碏)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후 석후(石厚)에게 진귀한 예물을 준비하여 진나라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라고 명했다.
그래서 석작(石碏)은 몰래 사신을 진나라에 파견함과 동시에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나라는 약소국가이고 나는 이제 늙어서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주우(州吁)와 석후(石厚)는 위나라 환공을 죽인 살인범입니다. 며칠 후 진나라를 방문할 것인데 즉시 체포하십시요.”
주우(州吁)와 석후(石厚)가 진나라에 도착되었다. 진환공은 즉시 그들을 체포하였다. 얼마 후에 위나라에서 파견된 살수에 의하여 주우(州吁)는 살해되었다.
진나라에서는 석작(石碏)에게 석후(石厚)는 당신의 친자식이므로 살려 주어야 겠다고 말했다.
석작(石碏)은 단호히 거절하고 신하 유양견(孺羊肩)을 파견하여 자기 친 아들 석후(石厚)을 살해하게 하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