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11세(歲)에 중국제일(中國第一)의 기성(棋聖)이 된후 20년 동안 천하무적(天下無敵)을 유지한 오청원 :

11세(歲)에 중국제일(中國第一)의 기성(棋聖)이 된후 20년 동안 천하무적(天下無敵)을 유지한 오청원 : 저명(著名)한 위기(圍棋) 신동(神童)、백년기성(百年棋聖) 오청원(吳清源)은 중국(中國)의 기성(棋聖)이다. 오청원의 인생(人生)의 대부분(大部分) 시간은 일본(日本)에서 보냈지만 3 차례나 국적(國籍)을 고쳤다. 오청원(吳清源)은 중국의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에서 1914년에 태어났다. 오청원은 유년시절에 여러가지 질병이 있었으므로 신체는 매우 허약하였다. 오청원은 7세(歲) 때 부터 부친(父親) 오의학(吳毅學)으로 부터 바둑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매일 10시간 씩 바둑을 두고 배웠다. 그당시 오청원의 고향에서는 오청원과 바둑실력을 겨룰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바둑의 신동(神童)」이란 영예를 얻었다. 오청원이 9세(歲)되던 해 부친(父親)을 따라 북경(北京)으로 이사하였다. 당시 북경에는 전국(全國)의 내노라하는 정첨기수(頂尖棋手)들이 모여 기예(棋藝)를 연마하였다. 1924년,오청원의 부친(父親)은 폐병(肺病)으로 거세(去世)하였는데 그당시 오청원은 11세(歲)였다. 오청원의 전가족은 이때부터 생활고를 겪어야만 했다. 전가족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당시 중국은 돤치루이(段祺瑞)가 집정(執政)하던 시기(時期)였는데 돤치루이는 위기(圍棋)를 매우 좋아하였다. 별인(別人)이 추천하여 13세인 오청원(吳清源)은 돤치루이(段祺瑞)와 대전(對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機會)를 얻었다. 돤치루이(段祺瑞)는 오청원 바둑실력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생활고로 허덕이는 오청원에게 매월 100원(元)을 지급하였다. 오청원(吳清源)은 100원을 가지고 온가족이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돤치루이(1865年3月6日-1936年11月2日)는 중국의 군벌이자, 정치가인데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화민국의 최고 권력자였으며 중화민국의 국무총리와 임시집정을 역임하였다. 돤치루이는 몇 차례 매달 100원씩 오청원(吳清源)에게 주다가 어떤 이유로 주지않았다. 그러나 이미 오청원(吳清源)의 명성은 온세상에 파다하게 퍼져 달관명류(達官名流)들이 앞을 다투어 오청원과 대국하기를 원했다. 그당시 오청원은 중국기단(中國棋壇)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청원을「중국제일(中國第一)의 기수(棋手)」라고 칭했다. 일본(日本) 기원(棋院)에서 오청원(吳清源)이라는 중국의 소년의 기력이 출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1928년 일본(日本) 위기계(圍棋界)의 태두(泰斗) 瀨越憲作 의 초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오청원(吳清源)과 오청원의 모친(母親)과 오청원의 형은 모두 일본(日本)으로 건너갔다. 오청원이 일본(日本)의 3명의 기수(棋手)들과 바둑을 둔 후에 일본바둑계에서 오청원의 바둑실력은 일본바둑의 3단(三段) 실력이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오청원이 16세(歲)되던 해에 일본기원(日本棋院)의 정식기사(正式棋士)가 되었다. 그당시 일본(日本)의 위기(圍棋) 레벨은 중국(中國) 보다 월등히 높았다. 1939년 부터 1956년 사이에 오청원(吳清源)은 10번기대국(十番棋對局) 중(中) 橋本宇太郎 과 坂田榮男 등을 비롯하여 일본(日本)의 최정첨적(最頂尖的) 7명의 초급기수(超級棋手)들을 모두 격패(擊敗)하므로써 「소화기성(昭和棋聖)」이란 영예를 얻었다. 그결과 그당시 일본(日本) 기단(棋壇)의 대사(大師)들이 전부(全部) 강급(降級)되었으며 「오청원(吳清源) 시대(時代)」가 열렸다. 오청원(吳清源)은 침묵과언(沉默寡言)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청심과욕(清心寡欲)한 성품을 지녔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1934년,오청원(吳清源)은 "일만화위기우호방문단(日滿華圍棋友好訪問團)" 을 조직하여 만주국(滿洲國)에 가서 "만주국(滿洲國)" 황제(皇帝) 부의(傅儀)와 바둑을 두었다. 1936년,오청원은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하여 국적(國籍)을 일본(日本) 국적으로 바꾸었다. 1941년,일본(日本)의 기사(棋士)들이 "기도보국회(棋道報國會)" 를 결성(結成)했는데 오청원은 노군(勞軍)으로 참가(參加)하였다. 1946년,일본(日本)이 세계 제 2 차 전쟁에서 패(敗)한 후 오청원은 일본국적(日本國籍)을 다시 중국(中國) 국적으로 바꿧다. 1979년 재차 일본국적으로 바꿨다. 왜냐하면가족들이 국적문제(國籍問題)로 일본 내에서 불공평(不公平)한 대우(待遇)를 받고 살기 때문이었다. 1961년 8월,오청원(吳清源)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치료를 받은 후 전신통증과 두통 등 엄중(嚴重)한 휴유증(後遺症) 때문에 바둑 성적(成績)이 의외(意外)로 지락천장(地落千丈)하여 1965년 제 4기 명인전(第四期名人戰) 때 8 연패(連敗) 기록을 수립하였다. 1973년 10단승단대회(十段昇段大會)가 오청원(吳清源)의 최후(最後)의 대전이었다. 그후 오청원은 위기생활(圍棋生活)에서 물러났다. 후에 오청원은 제자양성에 힘써 임해봉(林海峰)을 배양(培養)했으며 또 세계위기사상(世界圍棋史上) 최초의 여자(女子) 9단(九段) 예내위(芮乃偉) 등 기단(棋壇)의 명인(名人)들을 배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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