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1일 토요일

이조장군(二曹將軍)

이조장군(二曹將軍)
북송(北宋) 때 노국공(魯國公) 조빈은 양장(良將)이었다. 조빈은 인자하고 겸허하였으며 비록 전쟁 중에도 무고한 백성들을 함부로 살해하지 않았다.
건덕(乾德) 초년(서기 963 )에 촉()을 침공했을 때 부하들에게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명령하였으며 부녀자들을 간음하지 못하게 하였고 어린 소녀들을 희롱하지 못하게 하였다.
전쟁 중에 부하들이 부녀자들을 잡아와도 부녀자들 만 따로 한 곳에 모아 수용하였으며 위병들로 하여금 부녀자들의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조빈은 부하들에게 가정이 있는 부녀자들은 부하들의 호송하에 각 가정에 데라다 주었고 가족이 몰살 당했을 경우 부인들을 재가시켜 주었다.
조빈은 이 세상의 모든 백성들은 군왕의 백성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부가 이별하고 모자가 이별하여 슬피울고 있을 때 백성들을 위협으로부터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장사병 뿐이다.” 말했다.
조빈은 부하들에게 기율을 잘 지키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고 훈계하였다. 또 전쟁 중 어느 도시를 점령한 후 그 도시의 주민들을 모두 죽이지 말라. 백성들의 집을 불태우지 말라.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지 말라. 부녀자들을 간음하지 말라.” 고 장병들에게 경고했다.
또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달아나 자취를 감출 경우 나의 부모가 너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달아났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이 처자와 헤어져 처자의 행방을 모를 경우 나의 처자가 실종되었다고 생각하라고 조빈은 사병들에게 훈계했다.
후에 조빈이 병사들에게 강남의 금릉성을 공략하라고 명령을 내릴 때 조빈은 제일 먼저 천제에게 분향재배하며 천제님! 나는 무관입니다.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천제님! 나를 도와 주십시요! 나의 장병들이 사고를 덜 당하게 해주십시요!” 라고 기도했다.
조빈이 군대를 이끌고 금릉성을 공격할 때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군대를 출동하여 개선할 때 까지 병사들은 한 사람도 경거망동하지 않았으므로 금릉성 안에 있는 백성들과 적의 군사들은 조빈을 경외하고 명령에 복종하였다.
그 당시 또 다른 부대의 조한 장군이 군대를 통솔하여 강주성을 공략할 때 조한 장군은 누차 공격하였으나 강주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결국 조한 장군은 사병들에게 성안에 거주하는 양민을 모두 학살하고 약탈하며 부녀자들을 간음하라고 명령하였다. 조한 군장병들의 행동에 절제가 없었다. 그리하여 강주성 내의 모든 백성들은 조한 군장병들의 악랄한 행위에 대하여 운망과 원성이 드높았다.
조한 장군은 30세가 채 못되어 죽고 말았다.
조한 장군의 자손들은 타향으로 도망가서 숨어 살았고 걸식하는 노숙자들이 되었으며 타향으로 전전하며 길거리를 헤매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조빈의 아들 조찬과 조종과 조위는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음란한 행위를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재물을 약탈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교훈을 지키며 적선하였다.
조빈의 가족에 대하여 사적(史籍)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조빈의 큰 아들 조찬은 의지가 굳고 강직하며 좌씨춘추를 통독하였고 부하 장병들을 사랑하고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글안군이 침입해 올 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고 후에 동평장사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무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빈의 둘째 아들 조종은 성격이 주의깊고 신중했으며 관직은 도지휘사에 올랐고 죽은 후에 충각이란 시호를 받았다.
조빈의 셋째 아들 조위는 춘추삼전을 통독했으며 19세에 장군이 되어 노장들과 어깨를 겨누어 반란군을 평정하였다. 조위는 군기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군사를 다스렸기 때문에 조위의 군사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조위는 신출귀몰한 작전술로 40여 년간 장병들을 지휘하여 여러차례 전승을 거둔 장군이었다. 사후에 무목이란 시호를 받았다.
조빈 장군과 조한 장군의 품격과 행위에 큰 차이가 있었는데 결국 자식들에게 끼친 영향은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를 나타냈다.
이상의 고사는보명연수법 중 이조장군(二曹將軍)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宋朝魯國公曹彬,被譽良將第一。他待人謙和、仁慈,從不妄殺手下或百姓,即使兩軍交戰也不濫殺無辜。乾德初年伐蜀,陝中之郡、縣均被攻下;諸將打算屠城,唯獨曹彬重申命令:嚴禁濫殺。並規定不准姦淫婦女、調戲少女;凡被諸將捕之婦女,曹彬將們集中一處,令衛兵妥善看顧。戰事平息後,曹彬逐一面談,有家者,派兵護送回家,家人已亡故者,其備禮而嫁。
曹彬常想:茫茫宇宙皆天地之蒼生、君王之赤子;於兵戈擾攘時,夫婦分散,母子流離,若能稍開生路,則不至於悲夫泣妻,號子哭母;而能免除蒼生劫難的人,只有當權之將、帥。因此曹彬告誡他的兒子:領兵首重紀律,打仗不可屠城、焚燒民房、掠奪民財、姦淫婦女。見人之父母竄匿逃亡,應作我之父母倉皇無措想;見人之妻女流離失所,應作我之妻女恩情難割捨想。
後來,曹彬領兵下江南伐金陵時,先焚香禱告上天:「我是武官,必須盡忠職守,希望上天庇佑,減少傷亡。」曹彬並發願,攻下金陵城時,不殺任何人。自出師至凱旋,士兵個個自律,無人輕妄動,城內百姓與守城軍士對曹彬敬畏而服從。
當時同朝官之同姓將軍曹翰,攻江州城,屢攻不克,於是下令屠城,並縱容士兵掠奪百姓、姦淫女子,自己行也失檢;里百姓均痛恨曹翰之行
他死時不到三十歲,他的子孫逃亡外,乞食露宿,流落街頭。
曹彬的兒子曹璨、曹琮、曹瑋均承受乃父愛惜人命、不淫掠之善德。根據史籍記載:
曹璨,個性沈毅,好讀「左氏春秋」。官善於安撫士卒,帶領部屬恩威並施。契丹入侵時,領兵屢戰有功,後封同平章事,卒諡武懿。
曹琮,個性謹,官至都指揮使,諡忠恪。
曹瑋,平日喜讀古書,通「春秋」三傳;十九歲即將,領兵平叛軍,沈勇善謀有若老將;馭軍嚴明,其兵多效死之士。曹瑋用兵出入神速不可測,將領兵四十年,未曾失利過,卒諡武穆。
二位曹將軍之品格、行,大相逕庭,而子孫所得之庇佑與果報,也相去萬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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