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3일 화요일

신라초(新羅礁)와 고려도두(高麗道頭)

신라초(新羅礁)와 고려도두(高麗道頭)

명(明) 나라 제 13 대왕 신종(神宗 : 서기 1573 년 - 서기 1620 년) 만력(萬曆) 연간에 저술된 보타산지(普陀山志)에 보면 신라초(新羅礁)의 유지(遺址)에 관한 고사(故事)가 기록되어 있다. 일본 스님 혜악이 타고 가던 배가 신라초(新羅礁)에 부딪친 고사이다.

또 ”신라초재신우항구적대양(新羅礁在神牛港口的大洋), 보타산최서(普陀山最西).”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신라초(新羅礁)는 신우 항구 앞바다에 있으며 보타산의 가장 서쪽끝에 있다.” 는 뜻이다.

또 보타산지(普陀山志)에 보면 보타산(普陀山)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신우 항구는 일본의 혜악 스님이 도망가다가 암초에 부딪친 곳이며 보타산에서 40 분 정도 항해하면 나타난다.” 고 기록되어 있다.

보타산(普陀山)의 서역 지방의 해역을 연화양(蓮花洋)이라고 칭한다. 바다 가운데 큰 삿갓 처럼 생긴 암초가 솟아 올라와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홍비초(缸飛礁)라고 부른다.


수 많은 갈매기들이 앉아서 쉬었다가 날아가는 암초이다.

다음은 성당(盛唐) 시기에 일본의 혜악스님과 보타산(普陀山)에 얽힌 고사이다.

”야색강림(夜色降臨), 저수상선정재료금천보타산조음동하(這艘商船停在了今天普陀山潮音洞下), 나위일본화상혜악호무수의(那位日本和尙惠 谔毫無睡意), 저기개월래재중국적경력재타적뇌해중부단섬현(這幾個月來在中國的經歷在他的腦海中不斷閃現). 대약사개다월전(大約四個多月前), 산서오대산상적일좌보통사묘내(山西五臺山上的一座普通寺廟內), 일본화상혜악정재주조과(日本和尙惠谔正在做早課), 취재반년전(就在半年前), 타종일본래도중국(他從日本來到中國), 저일차(這一次), 이경시타제삼차도중국래료(已經是他第三次到中國來了). 혜악전후삼차도중국(惠 谔前後三次到中國), 주적도시일조명위동아해상사주지로적항선(走的都是一條名爲東亞海上絲綢之路的航船). 당조초년(唐朝初年), 종절강동부연해일대통왕신라일본등국(從浙江東部沿海一帶通往新羅日本等國), 유당인개벽출일조항선(由唐人開 辟一條航船), 당시이운수사주화자기위주(當時以運輸絲綢和瓷器爲主). 저조항선피후인칭위동아해상사주지로(這條航船被後人稱爲東亞海上絲綢之路). 혜악저차도오대산(惠 谔這次到五臺山), 시위료조배대지문수보살(是爲了朝拜大智文殊菩薩). 나시일본강강종당조인입불교(那時日本剛剛從唐朝引入佛敎), 혜악래당(惠 谔來唐), 야시위료학습경다적불법(也是爲了學習更多的佛法). 일천야리(一天夜里). 혜악견도일존관음보살적소상(惠 谔見到一尊觀音普薩的塑像), 저존소상보상장엄(這尊塑像寶像庄嚴), 제작정미(製作精美). 도과허다사묘적혜악(到過許多寺廟的惠谔), 야두일차견도저마정미적소상(也頭一次見到這麻精美的塑像). 혜악심생환희(惠谔心生歡喜), 타향사리주지제출(他向寺里主持提出), 요청저존소상회일본공봉(要請這尊塑像回日本供奉), 주지몰동의(主持沒同意), 혜악실망급료(惠谔失望及了). 저천야리(這天夜里), 혜악총시심신불녕(惠谔總是心神不寧), 나존소상총재타뇌해리섬현(那尊塑像總在他腦海里閃現), 타결정(他決定) : ”실재불행(實在不行), 취투착나주(就偸着拿走)!” 타환급자기조료일개이유(他還給自己 找了一個理由) : 저시출어선심(這是出於善心), 일본신중견성상능생경앙심(日本信衆見聖像能生敬仰心)! 혜악부단지향소상정례모배(惠谔不斷地向塑像頂禮膜拜), 기구관음보살양타대착소상순리지반회일본(企求觀音普薩讓他帶着塑像順利地返回日本). 주의일정(注意一定), 제이천(第二天), 타취투투파소상대주료(他就偸偸把塑像帶走了). 혜악종오대산파소상일로견항비포도료영파(惠谔從五臺山把塑像一路肩抗臂抱到了寧波), 재영파항탑상료저수신라상선준비회일본(在寧波港塔上了這 艘新羅商船準備回日本). 가부지위즘마(可不知爲 怎 么), 본래호호적천기일출항구취우도료풍랑(本來好好的天氣一出港口就遇到了風浪). 불구(不久), 상선취당도신라초상(商船就撞到新羅礁上).”

다시 말하면 ”어둠이 짙어 가기 시작했다. 혜악 스님이 탄 배는 오늘 밤 보타산(普陀山) 조음동(潮音洞)에 머물어야 한다.

일본의 혜악 스님은 잠을 자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지난 몇 개월 동안 머리속에 언듯 나타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혜악 스님은 6 개월 전에 중국을 다녀갔고 약 4 개월 전에 오대산 산정에 있는 보통사(普通寺)에서 조과(早課)를 드렸다.

이번이 세 번째 중국 방문이다.

세 차례 중국을 방문할 때 마다 혜악 스님은 ”동아해상의실크로드(SILK ROAD)”를 통하여 배를 타고 갔다.

당(唐) 나라 초기 부터 당(唐) 정부에서는 절강성 동부 연해(沿海) 일대에 고구려, 신라, 백제, 일본 등에 오직 한 개의 항로를 열어 주었다.

그 당시 주로 비단(SILK)과 도자기 등을 배로 실어 날랐다. 이 항로를 후세 사람들은 "동아해상의 실크로드" 라고 칭했다.

혜악 스님이 세 번째 오대산을 방문한 것은 대지문수보살(大智文殊菩薩)을 배알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일본은 당 나라로 부터 불교를 전입하여 한창 발전하기 시작하는 때였다. 혜악 스님은 더 많은 불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중국을 드나들었다.

혜악 스님이 당 나라를 방문한 때는 대략 서기 850 년 경임으로 지금부터 1250여 년전 일이다.

어느 날 밤 혜악 스님은 관음보살의 소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장엄하고 정밀하며 정교하게 제작된 아름다운 소상이다고 생각했다. 혜악 스님은 과거에 수 많은 사찰을 돌아 다녔지만 처음으로 이와 같이 정교하게 제작된 관음보살의 소상을 본 것이다.

혜악 스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절안에 있는 주지 스님을 만나러 갔다. 혜악 스님은 주지 스님께 ”관세음보살의 소상을 일본에 가져다 바치고 싶은데 줄수 없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주지 스님은 일언지하에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혜악 스님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날 밤 혜악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소상이 온통 머리속에 떠 올라 심신이 편치 않았으며 한숨도 잠을 잘수 없었다.

혜악 스님은 ”사실대로 해서는 않됨으로 관세음보살의 소상을 도둑질해서 도망치는 수 밖에 없지!” 라고 마음을 굳혔다.

혜악 스님은 자기 나름대로 적당한 이유를 부쳐 도둑질을 합리화시켰다. 즉 선의(善意)의 도둑질이며 일본의 불교 신도들이 관세음보살의 소상을 봄으로써 경앙심(敬仰心)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도둑질 하는 것이다고 이유를 댔다.

혜악 스님은 계속 관세음보살의 소상 앞에 무릎을 꿇고 ”관세음보살에게 도둑질한 소상을 일본 까지 무사히 가지고 가게 도와 주십시요!” 하고 기도하였다.

이튿 날 밤 혜악 스님은 가슴을 조아리며 두 손을 떨어가며 관세음보살의 소상을 훔쳐 달아났다.

혜악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소상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품안에 앉기도 하며 천신만고 끝에 오대산에서 영파 까지 장장 1250 km를 달려왔다.

영파에 도착하니 마침 일본으로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는 신라의 배 한 척이 있어 얼른 올라탔다.

어째서 그런지 몰라도 배가 출항할 때는 날씨가 무척 좋았다. 그러나 도중에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 신라의 상선은 신라초에 부딪치고 말았다.” 는 뜻이다.


지금 부터 일 천 이백 여 년전에 신라(新羅)의 상선들이 신라초(新羅礁)를 거쳐 영파(寧波)항구로 들어갔었다. 수 많은 신라(新羅)의 상선들이 신라초(新羅礁)에 부딪쳐 침몰하였다. 그래서 신라초(新羅礁)란 이름을 얻었다.

신라(新羅)의 상선들은 중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동남아 지역으로 해상무역을 하기 위하여 빈번히 왕래하였다. 물론 신라(新羅)와 일본의 승려들이 불법을 습득하기 위하여 당나라를 방문하였다.

송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豊) 년간에 고려에서 매년 공물(貢物)을 송나라에 바치러 갈때 반드시 고려도두(高麗道頭)를 통과해야 되기 때문에 고려란 관명(冠名)을 이 도두에 붙여 고려도두(高麗道頭)란 이름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상선들이 고려도두(高麗道頭)를 통과하여 영파 항구로 들어 갔기 때문에 ”해상실크로드” 란 영예를 얻었다.

그 당시 신라의 청해진수(淸海鎭守) 장보고(張保皐) 팀은 방대한 해상무역 선대(船隊)로 이름을 날렸으며 “해상왕(海上王)” 이란 영예를 얻었다. 장보고(張保皐)는 해상(海上) 실크로드(SILK ROAD)를 무대로 주름을 잡았다.

그 당시 초주(楚州)의 신라방(新羅坊)은 인기를 모았었다. 초주(楚州)는 현재 강소성(江蘇省) 중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회안시(淮安市)이다.

초주(楚州)는 한(漢) 나라의 한신(韓信)과 송 나라의 한세충(韓世忠)을 비롯하여 임칙서(林則徐)와 서유기(西遊記)의 작자 오승은(吳承恩)과 주은래(周恩來)의 고향이다.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 연안의 4 대 도시 중 하나이다.

초주(楚州)는 회하(淮河) 강변에 있는 도시이다.

초주(楚州)의 신성북진방(新城北辰坊)에 신라방이 있었다. 수 천명을 헤아리는 신라 교민(僑民)들이 살고 있었으며 신라 사람들은 이곳에서 조선업(造船業)과 항해업(航海業)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 당시 신라방(新羅坊)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조선술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초주(楚州) 신라방은 소북(蘇北) 일대와 연수(漣水)와 해주(海州)등지에 퍼져있던 중소(中小) 신라방의 중심기구였으며 오늘날 영사관 비슷하였다.

당 나라 정부에서 신라방(新羅坊)에 거주하는 신라 사람들에게는 10 년 동안 세금을 면세해 주는 혜택을 부여했다.

일본 사람들은 당 나라를 방문했다가 볼일 보고 나서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초주(楚州)의 신라방(新羅坊)에 들려 배를 주문해 놓고 귀국하였다.

특히 천주(泉州)와 광주(廣州)를 방문한 일인(日人)들도 신라방에 들려 배를 주문하거나 배를 빌려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고승(高僧) 원인법사(園仁法師)는 불법을 학습하러 당 나라를 세 차례 방문했었는데 첫번째는 개원사(開元寺)에 머물었고 두번 째는 용흥사(龍興寺)에 머물었으며 세번 째는 신라방(新羅坊)에 머물었다.

그후 일본의 많은 승려들과 상인들이 신라방(新羅坊)에 투숙했었다.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에서 온 상인들과 승려들은 물론 일본의 상인들과 승려들이 신라방(新羅坊)에 머물었다.

혜악(惠谔) 스님 역시 신라방(新羅坊)에 머물었었다.

혜악(惠谔) 스님은 잠자리에 드러 누워서 자신이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소상을 도둑질한 것이 불경(佛經)의 계율(戒律)을 범한 것인가? 곰곰히 생각해 봤다.

혜악(惠谔) 스님의 생각은 불상을 훔친 것은 투계(偸戒)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소상을 일본으로 가지고 돌아가면 더 많은 신도들이 참배하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삼일이 지난 후 조음동(潮音洞) 부근에 있는 신라의 상선은 잘 수리 되었다. 바람도 이제 잠잠해 졌다.

그러나 선장은 풍향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출항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틀을 더 기다렸다. 그 다음 날 새벽에 출항한다고 선장은 말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출항 직전에 또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선장은 출항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혜악(惠谔) 스님은 출항을 강행해 보자고 선장과 신라 상인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혜악(惠谔) 스님의 의견에 반대했다.

항해 경험이 풍부한 신라 선장은 항해 수 십년에 이번 처럼 일기가 불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선장은 조음동(潮音洞)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려도두(高麗道頭)가 있는데 그곳에서 마실 물과 먹을 음식물을 보충해야 된다고 말했다.

도두(道頭)란?

고대의 부두를 말한다. 즉 선창가이다.

이전에 고려(高麗)에서 상선을 타고 들어오는 고려인(高麗人)들은 대부분 보제선사(普濟禪寺)에 올라가 참배하였다.

그래서 고려도두(高麗道頭)는 보제선사(普濟禪寺) 부근에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현재는 고려도두(高麗道頭)가 육지로 변했다.

보제선사(普濟禪寺)로 가는 옛길의 한 쪽은 석벽(石壁)이며 또 다른 한 쪽은 방파제를 쌓아 놓았다.

보제선사(普濟禪寺)에서 서쪽으로 1km 내려 오면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도로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옛날 고려도두(高麗道頭) 자리란다.

지금은 육지로 변하여 아파트가 들어차고 전답(田畓)으로 변해 버렸다.

창해변성상전(滄海變成桑田)이란 말과 마찬가지로 현재 보제선사에서 부터 고려도두(高麗道頭) 까지 약 1.5km 의 고로(古路)의 서쪽 끝은 완전히 육지로 변했다.

신라와 고려에서 보제선사(普濟禪寺)에 참배하러 온 불교 신도들은 고려도두(高麗道頭)에서 하선(下船)하자 마자 1.5km 의 옛길을 걸어서 보제선사(普濟禪寺)에 올라갔다.

그러므로 지난 일 천 이백 여년 동안 바닷가에서 부터 시작하여 약 500m 정도가 육지로 변해 버린 셈이다.

일 천 이백 여년 전 일본의 혜악(惠谔) 스님은 이곳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하고 있었으며 비몽사몽간에 악몽만 계속 나타났다.

혜악(惠谔) 스님은 새벽에 일어나 도둑질해 온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소상 앞에서 무릎을 꿇어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소상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정례(頂禮)를 마친 후 혜악 스님은 함께 배를 타고 온 신라 사람들에게 ”나는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소상을 보타산(普陀山) 위에 놓아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고 말했다.

혜악(惠谔) 스님의 갑작스런 결정에 모두 깜짝놀랐다.

혜악(惠谔) 스님은 ”내가 어제 밤에 꿈을 꾸었는데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이 꿈에 나타나서 자기의 소상을 보타산(普陀山) 위에 보존 해 두라고 부탁했습니다.” 고 말했다.

어민(漁民)들이 고기잡이 나가기 전에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 소상 앞에 정례(頂禮)한 후 떠나면 위험이 없다고한다.

북송(北宋)의 제 8 대왕 휘종(徽宗) 선화(宣和) 5 년(서기 1123 년)에 서경(徐竟)이란 대신(大臣)이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서경(徐竟)이 고려(高麗)를 향하여 출항하는 날 갑자기 태풍이 불어 닥쳤다.

대신(大臣) 서경(徐竟)은 보타산(普陀山)에 올라가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소상 앞에 정례하였다.

그날 밤 부터 태풍이 그치기 시작하더니 일기가 좋아지면서 잔잔한 파도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대신(大臣) 서경(徐竟)은 그 이튿 날 배를 타고 순항하여 고려(高麗)에 도착되었다.

고려(高麗) 역시 휘종(徽宗) 때 였다.

혜악(惠谔) 스님은 일본으로 돌아와 관음신앙을 선포하였다. 후세인들은 혜악(惠谔) 스님이 보타산을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현령설법(顯靈說法) 도장(道場)으로 만든 시조라고 칭했다.

혜악(惠谔) 스님은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소상을 오대산에서 도둑질 하여 품에 앉고 천신만고 끝에 1250 km 의 긴 여행을 마치고 보타산(普陀山) 위에 안좌(安坐)시킨 스님이다.

최근 일본의 33개의 사찰에서 33 존(尊)의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소상을 증정하였다. 일본의 신도들은 보타산이 세계 불교에서 공인된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의 성지(聖地)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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