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혈봉후(見血封喉)
독일 사람으로써 서기 1622 년에 명 나라에 들어간 탕약망(湯若望)이란 선교사가 있다. 그는 1645 년에 흠천감(欽天監 : 천문대장)을 지냈고 1646 년에 시헌력(時憲曆)을 완성했으며 신역법(新曆法 : 현재의 陽曆)을 중국에 최초로 보급한 사람이다
청(淸) 나라 제 3 대왕 순치황제(順治皇帝 : 서기 1644 년 – 서기 1661년)의 왕사(王師)를 지내기도 하였다.
탕약망(湯若望)의 본명은 Johann Adam Schall Von Bell (서기 1591 년 – 서기 1666 년)이며 세조(世祖 : 順治)의 황태후의 원인 모를 병을 치료해 순치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탕약망(湯若望)은 간신(奸臣) 오배(鰲拜)를 비롯한 궁정(宮廷) 대신(大臣)들의 모함으로 반역죄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다.
투옥된 이유 중 하나는 견혈봉후(見血封喉)라는 독(毒) 나무 가지로 침(針)을 만들어 순치황제(順治皇帝)를 찔러 죽였다는 것과 주술을 써서 일찍 죽게 했다는 것이다.
후에 제 4 대왕 강희(康熙(聖祖) : 서기 1662 년 – 서기 1722 년)에 의하여 다행히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다.
왜냐하면 궁내(宮內)에서 견혈봉후(見血封喉)라는 독나무를 본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견혈봉후(見血封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견혈봉후(見血封喉)는 아열대와 열대 식물이므로 수도 북경과 같은 북부 온대 지방에서는 서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견혈봉후(見血封喉)는 비가 많이 와서 습기가 많은 고온 다습한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해남도(海南島)의 가장 남쪽 도시 능수현(陵水縣 : 북위 18 도) 북부와 만녕시(萬寧市) 사이에서 견혈봉후(見血封喉)가 생장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식물과 청(淸) 나라 제 5 대왕 세종(世宗 : 서기 1723 년 – 서기 1735 년)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다음은 민간에 전해 내려 오는 혈적자(血滴子)에 관한 두 가지 다른 고사(故事)이다.
첫째 한 여름철에 매미들은 높은 나무 가지 위에 앉아 하루 종일 운다. 어떤 사람들은 긴 대나무 끝에 찐득 찐득한 점성(粘性) 물질을 발라 달라 붙게하여 매미를 잡는다.
청(淸) 나라 제 5 대왕 세종(世宗 : 서기 1723 년 – 서기 1735 년) 때 정부기관 중에 특무기구(特務機構)가 설립되었다. 특무대원들은 평민복 차림으로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찻집에 들어가서 차(茶)를 마시며 호동(胡同 : 골목)을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여론을 몰래 청취하여 조정(朝廷)에 보고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이 특무기구의 별명은 점간처(粘竿處)란 별명을 갖고 있었으며 특무대원들은 혈적자(血滴子)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점간처(粘竿處)란?
긴 대나무 끝에 아교풀과 같이 찐득 찐득한 물질을 발라 반정부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높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신나게 노래하는 매미를 사로 잡듯이 반정부 인사들을 속출해 내는 기구란 뜻이다.
혈적자(血滴子)에 대한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청(淸) 나라 제 11 대왕 덕종(德宗 : 서기 1875 년 – 서기 1908 년) 광서(光緖) 년간에 궁안에 있는 독약(毒藥) 창고 속에서 두 병의 독약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옹정(雍正 : 世宗) 초년(初年)에 광서성(廣西省) 무신소(抚臣所)에서 바친 독약이었다.
청대야사(淸代野史)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옹정(雍正)이 즉위하자 마자 광서(廣西) 순무(巡抚) 이발(李绂)에게 밀지(密旨)를 하달하여 광서 지방에 혹시 견혈봉후수(見血封喉樹)가 있는지 찾아 보라고 어명을 내렸다.
순무(巡抚)란?
임시로 지방에 파견하여 민정과 군정을 순시하던 대신을 일컫는다. 밀지란? 밀칙(密勅)이며 임금이 몰래 내린 지령이다.
옹정(雍正)이 밀칙을 하달한 이유는 혈적자(血滴子)라는 독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혈적자는 독사(毒蛇)의 독액(毒液)과 독나무의 즙액(汁液)을 혼합하여 만든 독약이었다.
사람들이 견혈봉후(見血封喉)란 말을 들었을 때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허구(虛構)한 물질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이 창조한 실질적인 독나무이다.
해남도 남단의 만녕시(萬寧市) 열대식물원에 가보면 직접 견혈봉후(見血封喉)를 볼수 있다. 키가 크고 나뭇잎이 무성하기 때문에 보통 나무와 똑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견혈봉후(見血封喉樹) 속에 극독약즙이 들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견혈봉후(見血封喉)는 키가 큰 상록(常綠) 교목(喬木)이며 보통 키가 평균 30m 쯤 이나 된다.
견혈봉후수(見血封喉樹)의 독성 성분은 견혈봉후감(見血封喉苷 : 사포닌)인데 심장의 혈액 수출량을 대폭 증가시켜 심장박동을 빠르게 해주는 공능이 있다.
현대 의약학상 연구 개발 가치가 높은 식물이다. 견혈봉후수(見血封喉樹)는 심장병의 치료는 물론 강심(强心) 작용에 관한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견혈봉후(見血封喉) 수피(樹皮) 속에 들어있는 독즙(毒汁)이 사람의 피부에 있는 상처 속에 묻어 혈액속으로 들어가면 호흡이 마비되고 근육이 마비되며 혈액이 응고되고 심장박동이 감약되며 최후로 심장이 멈추어 사망하게 된다.
잘못으로 인하여 제독(制毒) 시키지 않고 먹을 경우 심장마비와 심박정지가 되며 유즙(乳汁)이 눈 속으로 들어갈 경우 즉시 장님이 된다.
유즙(乳汁)을 화살 촉 끝에 발라 사람과 동물에 쏘아 맞으면 즉사한다. 견혈봉후(見血封喉) 겉에 하얀 백반(白斑)을 볼수 있는데 유백색 독즙이 소나무의 송진 처럼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견혈봉후(見血封喉)의 학명은 Antiaris Toxicaria 이다. 전독목(箭毒木) 또는 견혈봉후(見血封喉)라고도 칭한다.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전독수(箭毒木), 저명자시유어이전적인용타적수즙도도전두상사살야수이래(這名字是由於以前的人用它的樹汁塗到箭頭上射殺野獸而來), 거설(據說), 피사중적야수(被射中的野獸), 왕파상주칠보혹왕파하주팔보(往坡上走七步或往坡下走八步), 우혹자재평지상주구보(又或者在平地上走九步), 도필사무의(都必死無疑), 당지인칭칠상팔하구불활(當地人稱七上八下九不活).”
다시 말하면 ”전독수(箭毒樹)란? 고인들이 이 나무의 즙을 화살촉 끝에 발라 짐승을 사냥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들 짐승들은 이 나무의 독이 묻은 화살에 맞으면 언덕을 올라갈 때는 일곱 발(步) 걸어가서 쓰러져 죽고 언덕을 내려올 때는 여덟 발(步) 걸어가서 쓰러져 죽으며 평지를 걸어 갈때는 아홉 발(步) 만 걸어가면 쓰러져 죽는다. 그래서 화살촉에 맞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칠상팔하구불활(七上八下九不活)” 이란 속어를 만들어 냈다.” 는 뜻이다.
옛날에 동인도(東印度) 군도(群島)의 원주민과 영국군이 싸울 때 동인도(東印度) 제도의 인디언들은 화살촉 끝에 견혈봉후수(見血封喉樹)의 즙액을 묻혀 영국 사병(士兵)들을사살했었다.
견혈봉후(見血封喉)의 독성을 사용하여 봉건 황제들은 반정부 인사들을 살해했고 들 짐승들을 사냥하였다.
고대 중국에서 독주(毒酒)를 사용하여 사형을 집행했었는데 그중 하나는 짐주(鸩酒)가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末期) 진(秦 : BC 403 년 – BC 221 년) 나라의 정치가 여불위(呂不韋 : ? – BC 235 년)는 진(秦) 나라 제 10 대왕 장양왕(壯襄王 : BC 249 년 – BC 247 년) 때 승상(丞相)에 올랐다.
여불위는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한 사람이다. 장양왕이 죽고나서 제 11 대왕위에 오른 진왕(秦王(政))은 실제로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여불위는 정(政)의 모친과 밀통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폭로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는데 그 독약이 바로 짐주(鸩酒)이었다.
고대에 독(毒)은 궁정(宮廷) 음모(陰謀)와 직결되었으며 궁정 음모엔 항상 독주가 뒤따랐다. 죽이긴 죽여야 겠는데 가혹한 형벌은 차마 내릴 수 없고 대신(大臣)들의 체면을 살려 점잖게 임금이 대신(大臣)들에게 사약(賜藥 : 毒酒)을 내려 마시게 함으로써 자결케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짐(鸩)은 일종의 새인데 깃털 속에 독이 있어 그 깃털과 함께 담근 술을 마시면 즉사한다고 한다. 짐주(鸩酒) 외에 궁중에서 사용했던 또 하나의 독약은 견기약(牽機藥)이다.
전독목(箭毒木)의 입약(入藥) 부분은 수즙(樹汁)이고 성미(性味)는 온(溫), 고(苦), 극독(劇毒)이다. 고혈압과 심장병을 치료하는데 독을 제거시킨 후 유효 성분을 취하여 사용한다. 전독목의 독성 해독에 홍배죽간초(紅背竹竿草)를 사용한다.
전독목(箭毒木)의 수령(樹齡)은 200년 이상이고 최근 광동성(廣東省) 뇌주시(雷州市) 뇌성진(雷城鎭) 상파남촌(上坡南村)에서 20 주(株)가 발견되었고 뇌주시(雷州市) 전체에서 약 600 주(株)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뇌주(雷州)는 개명되어 현재는 해강시(海康市)라고 부른다. 광동성의 서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뇌주(雷州) 반도내에 있는 시(市)이다. 동한(東漢) 때 복파(伏派) 장군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며 유배지(流配地)로써 이름 난 곳이다. 예를 들면 소동파(蘇東坡), 소철(蘇轍), 구준(寇准), 진관(秦觀), 이강(李綱) 등을 포함하여 열 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귀양갔던 곳으로써 이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십현사(十賢祠)가 건립되었다.
독일 사람으로써 서기 1622 년에 명 나라에 들어간 탕약망(湯若望)이란 선교사가 있다. 그는 1645 년에 흠천감(欽天監 : 천문대장)을 지냈고 1646 년에 시헌력(時憲曆)을 완성했으며 신역법(新曆法 : 현재의 陽曆)을 중국에 최초로 보급한 사람이다
청(淸) 나라 제 3 대왕 순치황제(順治皇帝 : 서기 1644 년 – 서기 1661년)의 왕사(王師)를 지내기도 하였다.
탕약망(湯若望)의 본명은 Johann Adam Schall Von Bell (서기 1591 년 – 서기 1666 년)이며 세조(世祖 : 順治)의 황태후의 원인 모를 병을 치료해 순치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탕약망(湯若望)은 간신(奸臣) 오배(鰲拜)를 비롯한 궁정(宮廷) 대신(大臣)들의 모함으로 반역죄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다.
투옥된 이유 중 하나는 견혈봉후(見血封喉)라는 독(毒) 나무 가지로 침(針)을 만들어 순치황제(順治皇帝)를 찔러 죽였다는 것과 주술을 써서 일찍 죽게 했다는 것이다.
후에 제 4 대왕 강희(康熙(聖祖) : 서기 1662 년 – 서기 1722 년)에 의하여 다행히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다.
왜냐하면 궁내(宮內)에서 견혈봉후(見血封喉)라는 독나무를 본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견혈봉후(見血封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견혈봉후(見血封喉)는 아열대와 열대 식물이므로 수도 북경과 같은 북부 온대 지방에서는 서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견혈봉후(見血封喉)는 비가 많이 와서 습기가 많은 고온 다습한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해남도(海南島)의 가장 남쪽 도시 능수현(陵水縣 : 북위 18 도) 북부와 만녕시(萬寧市) 사이에서 견혈봉후(見血封喉)가 생장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식물과 청(淸) 나라 제 5 대왕 세종(世宗 : 서기 1723 년 – 서기 1735 년)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다음은 민간에 전해 내려 오는 혈적자(血滴子)에 관한 두 가지 다른 고사(故事)이다.
첫째 한 여름철에 매미들은 높은 나무 가지 위에 앉아 하루 종일 운다. 어떤 사람들은 긴 대나무 끝에 찐득 찐득한 점성(粘性) 물질을 발라 달라 붙게하여 매미를 잡는다.
청(淸) 나라 제 5 대왕 세종(世宗 : 서기 1723 년 – 서기 1735 년) 때 정부기관 중에 특무기구(特務機構)가 설립되었다. 특무대원들은 평민복 차림으로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찻집에 들어가서 차(茶)를 마시며 호동(胡同 : 골목)을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여론을 몰래 청취하여 조정(朝廷)에 보고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이 특무기구의 별명은 점간처(粘竿處)란 별명을 갖고 있었으며 특무대원들은 혈적자(血滴子)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점간처(粘竿處)란?
긴 대나무 끝에 아교풀과 같이 찐득 찐득한 물질을 발라 반정부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높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신나게 노래하는 매미를 사로 잡듯이 반정부 인사들을 속출해 내는 기구란 뜻이다.
혈적자(血滴子)에 대한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청(淸) 나라 제 11 대왕 덕종(德宗 : 서기 1875 년 – 서기 1908 년) 광서(光緖) 년간에 궁안에 있는 독약(毒藥) 창고 속에서 두 병의 독약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옹정(雍正 : 世宗) 초년(初年)에 광서성(廣西省) 무신소(抚臣所)에서 바친 독약이었다.
청대야사(淸代野史)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옹정(雍正)이 즉위하자 마자 광서(廣西) 순무(巡抚) 이발(李绂)에게 밀지(密旨)를 하달하여 광서 지방에 혹시 견혈봉후수(見血封喉樹)가 있는지 찾아 보라고 어명을 내렸다.
순무(巡抚)란?
임시로 지방에 파견하여 민정과 군정을 순시하던 대신을 일컫는다. 밀지란? 밀칙(密勅)이며 임금이 몰래 내린 지령이다.
옹정(雍正)이 밀칙을 하달한 이유는 혈적자(血滴子)라는 독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혈적자는 독사(毒蛇)의 독액(毒液)과 독나무의 즙액(汁液)을 혼합하여 만든 독약이었다.
사람들이 견혈봉후(見血封喉)란 말을 들었을 때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허구(虛構)한 물질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이 창조한 실질적인 독나무이다.
해남도 남단의 만녕시(萬寧市) 열대식물원에 가보면 직접 견혈봉후(見血封喉)를 볼수 있다. 키가 크고 나뭇잎이 무성하기 때문에 보통 나무와 똑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견혈봉후(見血封喉樹) 속에 극독약즙이 들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견혈봉후(見血封喉)는 키가 큰 상록(常綠) 교목(喬木)이며 보통 키가 평균 30m 쯤 이나 된다.
견혈봉후수(見血封喉樹)의 독성 성분은 견혈봉후감(見血封喉苷 : 사포닌)인데 심장의 혈액 수출량을 대폭 증가시켜 심장박동을 빠르게 해주는 공능이 있다.
현대 의약학상 연구 개발 가치가 높은 식물이다. 견혈봉후수(見血封喉樹)는 심장병의 치료는 물론 강심(强心) 작용에 관한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견혈봉후(見血封喉) 수피(樹皮) 속에 들어있는 독즙(毒汁)이 사람의 피부에 있는 상처 속에 묻어 혈액속으로 들어가면 호흡이 마비되고 근육이 마비되며 혈액이 응고되고 심장박동이 감약되며 최후로 심장이 멈추어 사망하게 된다.
잘못으로 인하여 제독(制毒) 시키지 않고 먹을 경우 심장마비와 심박정지가 되며 유즙(乳汁)이 눈 속으로 들어갈 경우 즉시 장님이 된다.
유즙(乳汁)을 화살 촉 끝에 발라 사람과 동물에 쏘아 맞으면 즉사한다. 견혈봉후(見血封喉) 겉에 하얀 백반(白斑)을 볼수 있는데 유백색 독즙이 소나무의 송진 처럼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견혈봉후(見血封喉)의 학명은 Antiaris Toxicaria 이다. 전독목(箭毒木) 또는 견혈봉후(見血封喉)라고도 칭한다.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전독수(箭毒木), 저명자시유어이전적인용타적수즙도도전두상사살야수이래(這名字是由於以前的人用它的樹汁塗到箭頭上射殺野獸而來), 거설(據說), 피사중적야수(被射中的野獸), 왕파상주칠보혹왕파하주팔보(往坡上走七步或往坡下走八步), 우혹자재평지상주구보(又或者在平地上走九步), 도필사무의(都必死無疑), 당지인칭칠상팔하구불활(當地人稱七上八下九不活).”
다시 말하면 ”전독수(箭毒樹)란? 고인들이 이 나무의 즙을 화살촉 끝에 발라 짐승을 사냥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들 짐승들은 이 나무의 독이 묻은 화살에 맞으면 언덕을 올라갈 때는 일곱 발(步) 걸어가서 쓰러져 죽고 언덕을 내려올 때는 여덟 발(步) 걸어가서 쓰러져 죽으며 평지를 걸어 갈때는 아홉 발(步) 만 걸어가면 쓰러져 죽는다. 그래서 화살촉에 맞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칠상팔하구불활(七上八下九不活)” 이란 속어를 만들어 냈다.” 는 뜻이다.
옛날에 동인도(東印度) 군도(群島)의 원주민과 영국군이 싸울 때 동인도(東印度) 제도의 인디언들은 화살촉 끝에 견혈봉후수(見血封喉樹)의 즙액을 묻혀 영국 사병(士兵)들을사살했었다.
견혈봉후(見血封喉)의 독성을 사용하여 봉건 황제들은 반정부 인사들을 살해했고 들 짐승들을 사냥하였다.
고대 중국에서 독주(毒酒)를 사용하여 사형을 집행했었는데 그중 하나는 짐주(鸩酒)가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末期) 진(秦 : BC 403 년 – BC 221 년) 나라의 정치가 여불위(呂不韋 : ? – BC 235 년)는 진(秦) 나라 제 10 대왕 장양왕(壯襄王 : BC 249 년 – BC 247 년) 때 승상(丞相)에 올랐다.
여불위는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한 사람이다. 장양왕이 죽고나서 제 11 대왕위에 오른 진왕(秦王(政))은 실제로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여불위는 정(政)의 모친과 밀통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폭로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는데 그 독약이 바로 짐주(鸩酒)이었다.
고대에 독(毒)은 궁정(宮廷) 음모(陰謀)와 직결되었으며 궁정 음모엔 항상 독주가 뒤따랐다. 죽이긴 죽여야 겠는데 가혹한 형벌은 차마 내릴 수 없고 대신(大臣)들의 체면을 살려 점잖게 임금이 대신(大臣)들에게 사약(賜藥 : 毒酒)을 내려 마시게 함으로써 자결케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짐(鸩)은 일종의 새인데 깃털 속에 독이 있어 그 깃털과 함께 담근 술을 마시면 즉사한다고 한다. 짐주(鸩酒) 외에 궁중에서 사용했던 또 하나의 독약은 견기약(牽機藥)이다.
전독목(箭毒木)의 입약(入藥) 부분은 수즙(樹汁)이고 성미(性味)는 온(溫), 고(苦), 극독(劇毒)이다. 고혈압과 심장병을 치료하는데 독을 제거시킨 후 유효 성분을 취하여 사용한다. 전독목의 독성 해독에 홍배죽간초(紅背竹竿草)를 사용한다.
전독목(箭毒木)의 수령(樹齡)은 200년 이상이고 최근 광동성(廣東省) 뇌주시(雷州市) 뇌성진(雷城鎭) 상파남촌(上坡南村)에서 20 주(株)가 발견되었고 뇌주시(雷州市) 전체에서 약 600 주(株)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뇌주(雷州)는 개명되어 현재는 해강시(海康市)라고 부른다. 광동성의 서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뇌주(雷州) 반도내에 있는 시(市)이다. 동한(東漢) 때 복파(伏派) 장군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며 유배지(流配地)로써 이름 난 곳이다. 예를 들면 소동파(蘇東坡), 소철(蘇轍), 구준(寇准), 진관(秦觀), 이강(李綱) 등을 포함하여 열 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귀양갔던 곳으로써 이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십현사(十賢祠)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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