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있는 오래된 은행 나무들
200만 년 전에
지구는 신생대 제 4 기 빙하시대(Ice Age)였다. 그때 대부분의
식물과 동물은 멸종 단계에 있었다. 다행히 중국 대륙의 극소 부분은 빙하의 침습을 받지 않은 곳이 있었기에 은행 나무가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은행 나무를 활화석(活化石)이라고도
부른다.
은행 나무는
장수수종(長壽樹種)의 하나이다. 대개 일 천년 이상을 사는 은행 나무도
많이 있다.
북경 시내에 있는
담자사(潭柘寺)의 삼성전(三聖殿) 서쪽에 은행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요대(遼代 : 서기 916 년 –
서기 1125 년)의 은행 나무라고 한다.
청(淸) 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는 이
은행 나무를 제왕수(帝王樹)라고 이름을 하사하였다.
수령(樹齡)이 천 년을 훨씬 넘었다.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에 있는 여산(廬山 :
1474m)의 황룡사(皇龍寺) 내에
”황룡삼보수(黃龍三寶樹)” 중의 하나인 은행 나무는
진(晉) 나라 때 심은 것으로써 수령이 일 천년이 넘었다.
무이산(武夷山)
속에 높이 30m 이상이고 둘레가 6m 인 은행 나무는 감정 결과 수령이 일 천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감숙성(甘肅省)
롱남(陇南)에도 수령 일 천년
이상된 은행 나무가 있는데 중간에 화재를 입었는데도 밑둥에서 새싹이 세 개가 돋아 나와 지금은 둘레가 수 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호북성에서 수령
900 년 이상된 은행 나무를 발견했는데 지금부터 200 년 전에 벼락을 맞아 3
분의 1 이 부러져 버렸는데 남은 3 분의 2 가 다시 잘
살아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산동성
거현(莒縣) 부래산(浮來山) 속에 있는
정림사(定林寺)에 있는 은행 나무는 높이가 30m 이고 나무의 둘레는 어른
여덟 명이 손을 맞잡고 둘러서야 맞닿는 길이이다.
이 은행 나무는
상(商 : 기원전 16 세기 – 기원전
11 세기) 나라 때 심은 것이라고 하니
수령(樹齡)이 대략 3000년 이상된 것이다.
중수거지(重修莒志)에
보면 ”재노은공팔년(在魯隱公八年),
공원전715년(公元前715年),
노국여거국증재저과수하회맹(魯國與莒國曾在這棵樹下會盟),
대략거금100년전(大略距今100年前),
차수증피일장대화소과(此樹曾被一場大火燒過),
연이행존적수간우이기완강적생명력부활(然而幸存的樹幹又以其頑强的生命力復活),
현재차수잉연창경총욱(現在此樹仍然蒼勁蔥郁),
토염개화병결출우우과실(吐艶開花幷結出屢屢果實).”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노 나라 은공 8 년에 노국(산동성
곡부(曲阜)에 도읍을 정했던 주대(周代)의
나라)과 거국(산동성 거현(莒縣 : 제남의 동남쪽
200km 지점)에 도읍을 정했던 주대의 나라)의 제후가 이 은행 나무
밑에서 만나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지금부터 100 년 전에 화재를 만나 일부가 불에 타버리고
다행히 수간(樹幹)은 남아 완강한 은행의 생명력 때문에 부활하였다. 현재
이 은행 나무는 푸르고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많이 맺고 있다.” 는 뜻이다.
중국에서 은행 나무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천목산(天目山)은 항주(杭州)의
서쪽 90km 에 자리잡고 있는데 직경이 2m 이상되고 수령이 300년이
넘은 나무가 10여 그루 있어 대수왕국(大樹王國)이라고 칭한다.
그곳에서 빙하 시대의 은행 나무 화석이 발견되었다.
본초강목에 보면
”은행(銀杏), 원생강남(原生江南),
이훤성자위승(以萱城者爲勝),
수고이삼장(樹高二三丈), 엽박(葉薄),
종리엄(縱理儼), 여압장형(如鴨掌形),
유각결(有刻缺), 면록배담(面綠背淡),
이월개화성족(二月開花成簇), 청백색(靑白色),
이월개화(二月開花), 즉사락(卽卸落),
인한견지(人罕見之).”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은행의 원산지는 강남이며 그중 안휘성(安徽省)
훤성현(萱城縣)에서 생산되는 은행의 품질이 우수하다. 키는
2, 3 장(丈)이고 잎은 얇고 잎의 모양은 오리의 발바닥과 같으며 세로
무늬가 나 있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 있으며 잎의 앞면은 초록색이고 뒷면은 앞면 보다 좀 덜 푸르다. 이월에 청백색의 꽃이
무더기로 핀다. 2월에 핀 꽃은 금방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볼수 없다.” 는
뜻이다.
외국인들은 은행 나무를
“동방의 성수(聖樹)” 라고 말한다.
은행의
원명(原名)은 공손수(公孫樹)였는데 그 이유는 첫째
은행 나무는 심은지 20 년 내지 30 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고 40 년
내지 50 년이 지난 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결국 할아버지가 심어 놓은 은행 나무는 손자때에 가서 비로소 열매를
맺어 손자가 따 먹을수 있다. 그래서 공손수란 이름을 얻었다.
둘째 중화민족의 선조는
헌원(軒轅)인데 헌원의 성씨(姓氏)가
공손(公孫)이기 때문에 성씨를 따서 공손수라고 칭했다고 한다.
송(宋)
나라 때부터 은행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송(宋)
나라 때 은행은 임금에게 바치는 공품(貢品)이 되었기 때문이다.
송 나라 임금이 은행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시진은 본초강목에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송초시입공(宋初時入貢),
개호은행(改呼銀杏). 인기형사소행(因其形似小杏),
이핵백색(而核白色), 금명백과(今名白果).”
다시 말하면 ”송 나라
초기에 은행은 임금에게 바치는 공품으로 선택되면서 은행으로 개명되었다. 왜냐하면 은행의 모양은 작은
살구(杏)와 비슷하고 그 씨는 백색(銀)이므로 얻은
이름이며 오늘날에는 백과라고도 부른다.” 는 뜻이다.
은행 나무의
풍격(風格)은 특수하다. 나무가 크고 나무 전체의 모양은 천연 우산 처럼
생겼으며 푸른 잎사귀의 모양은 쥘부채 처럼 생겼고 윤기가 있고 깨끗하며 서리를 맞은 후에는 금부채로 변한다. 바람이 불면
둥실 둥실 떨어지는 잎사귀의 모습은 나방이가 춤을 추는 것과 흡사하여 어떤 시인은 은행잎을
비아엽(飛蛾葉)이라고 명명했다. 또 은행 잎의 모양이 오리의 발바닥과
비슷하므로 은행 나무를 압각수(鴨脚樹)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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