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초(萱草)는 아름다운
명화(名花)임과 동시에 영양이 풍부한 채소이고 양호한 약물이다. 훤초는
황화채, 금침채, 황화라고도 칭한다.
황화채와 황화는 꽃의 색깔이
노랑색이므로 얻은 이름이고 금침채는 꽃의 모양이 금침과 같아서 얻은 이름인데 금침채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한 토막의 전설이
있다.
”상전삼국명의화타유육근대소부동적금침(相傳三國名醫華陀有六根大小不同的金針), 당시(當時),
강소성일대온역유행(江蘇省一帶瘟疫流行),
화타문신천래위군중치병(華陀問訊赶來爲群衆治病).
단시(但是), 불기천(不幾天),
취유인파타대거급조조치병(就有人把他帶給曹操治病).
임행전(臨行前),
화타파타적육근금침유하래(華陀把他的六根金針留下來).
지견타용수일양(只見他用手一揚),
동시비출육도금광(同時飛出六道金光),
금침낙지처(金針落地處),
장출료일대편육판적금황색화타(長出了一大片六瓣的金黃色花朵), 노백성취용타적엽자전탕(老百姓就用它的葉子煎湯),
구제료온역(驅除了瘟疫).
후래인문위료기념화타(後來人們爲了紀念華陀),
파타규작금침채(把它叫作金針菜).
중국고대환칭훤초위요수화(中國古代還稱萱草爲療愁花),
망우(忘憂), 훤초화의남화(諼草和宜男花).”
다시 말하면 ”삼국시대
명의 화타는 환자들을 치료할 때 여섯 개의 크고 작은 금침(金針)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 당시 강소성(江蘇省) 일대에
온역(瘟疫)이 창궐하였다. 화타는 이리 저리 좇아 다니며 사람들에게 물어서
전염병이 유행되는 정황을 살핀 후 즉시 백성들의 질병 치료에 나섰다.
며칠 지난 후 관가에서 사람이 나와 화타는
조조(曹操)의 병환을 치료해야 된다고 화타를 강제로 끌고 가버렸다. 화타는
떠나기 전에 금침 여섯개는 남겨두고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화타는 여섯 개의 금침을 하늘 높이 던짐과 동시에 여섯 가닥의
가늘고 긴 광채가 하늘에 번쩍 나타났다. 이윽고 금침이 땅에 떨어지고 바로 그 자리에서 꽃잎이 여섯 개 달린 황금빛
화초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노백성들은 그 꽃의 잎사귀를 끓여 복용하고 나서
온역이 치유되었다. 후세의 고인들은 화타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그 꽃의 이름을
금침채(金針菜)라고 명명하였다.
고인들은 금침채를
요수화(療愁花), 망우(忘憂),
훤초(諼草), 의남화(宜男花)라고
불렀다.” 는 뜻이다.
화경(花鏡)에
보면 ”훤초통작훤(萱草通作蕿), 일명의남(一名宜男),
일명망우(一名忘憂).”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훤초는
훤훤과 통하고 일명 의남이라고도 하고 일명 망우라고도 한다.” 는 뜻이다.
여기서 의남이란?
아들을 많이 낳으라고 기원할 때 쓰는
말이다.
훤(萲)과 훤(蕿)과 훤(蘐)과 훤(諼)은 모두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요수화(療愁花)란?
근심과 걱정을 모두 잊게 만들어 마음을 편안하게
치료해 주는 꽃이란 뜻이 담겨 있다. 훤초는 근심을 덜어 준다는 뜻이 담겨있고 사람들이 이 꽃을 쳐다보고 있으면 아무리
큰 근심과 걱정일지라도 즉시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한 끝에 망우초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의남화란?
부녀자들이 훤초의 꽃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 남자
아이를 많이 날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적(古籍)
중에도 훤초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시경(詩經)-위풍(衛風)-백혜(伯兮)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언득훤초(焉得萱草),
언수지배(言樹之背), 원언사백(願言思伯),
사아심매(使我心痗).”
다시말하면”원추리 풀을 얻어서 집 뒷곁에다 심어
볼까? 오직 한 가지 그이 생각에 내 마음 참으로 쓰라리네!” 라는 뜻이다.
백혜는 전쟁터에 나간지 오래된 남편을 그리워
하는 부인이 지은 시(詩)이다.
본초주(本草注)에
보면
”훤초미감(萱草味甘),영인호환(令人好歡),락이망우(樂而忘憂).”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훤초의
미(味)는 감(甘)이고 요즘 세상 사람들은 훤초를
매우 좋아한다. 근심과 걱정을 잊어버리게 해주는 즐거움 때문이리라.” 는 뜻이다.
연수서(延壽書)에
보면
”눈묘위소(嫩苗爲蔬).식동풍(食動風),영인혼연여취(令人昏然如醉),고명망우(故名忘憂).”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훈초의 보드라운 새싹을 채소로써
먹고 나면 풍이 동하여 흡사 술에 취한 사람 처럼 정신을 흐리멍텅하게 만들어 모든 걱정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
망우(忘憂)이다.” 는 뜻이다.
양생론(養生論)에
보면 ”합환견분(合歡蠲忿),
훤초망우(萱草忘憂), 우지소공야(愚智所共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합환화는
화를 가라앉혀 주고 훤초는 근심과 걱정을 잊게 해주는데 지혜와 지능이 있는 사람이건 우매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건 모두에게 해당된다.”
는 뜻이다.
다음은 훤초에 대한 한 토막
고사(故事)이다.
“상전공원전이백다년전진승기의반진시(相傳公元二百多年前陳勝起義反秦時),
일차(一次) 타인기일몰유진식(他因幾日沒有進食),
아득비상난수(餓得非常難受),
유일가성황적모녀송래용훈초화자성적죽(有一家姓黃的母女送來用萱草花煮成的粥),
식후(食後), 진승득이활명(陳勝得以活命).
진승칭왕지후(陳勝稱王之後), 심환작락(尋歡作樂),
흘진료산해진미(吃盡了山海珍味),
인간가효(人間佳肴). 유일천(有一天),
타홀연상가당년황가모녀적해기지은(他忽然想起當年黃家母女的解肌之恩),
편파인파타문모녀양청래(便派人把她們母女俩請來).
진승청모녀자료일완황화채(陳勝請母女煮了一碗黃花菜),
식후연연설(食後連連說) : ”불호흘(不好吃).”
”불호흘(不好吃).”황파파소착대진승설(黃婆婆笑着對陳勝說)
: ”기아지시망우초향(飢餓之時忘憂草香),
흘관주시망우초고(吃慣酒時忘憂草苦).”일석화(一席話),
설득진승수괴득궤료하래(說得陳勝羞愧得跪了下來).
어시(於是), 타유하저모녀양(他留下這母女俩), 양타문종식망우초(讓她們種植忘憂草),
병장망우초개명위황화채(幷將忘憂草改名爲黃花菜).”
다시말하면”기원 전
200여 년 전에 진승(陳勝)은 진(秦)
나라 정부에 대항하는 의거(義擧)를 일으킨 사람이다. 진승은
며칠 동안 먹을 것이 없어 굶었기 때문에 아사지경에 처해 있었다.
어느 농삿군의 집에 어머니와 딸이 함께 살고
있었다. 황씨 할머니와 딸은 훤초화를 삶아서 쌀을 한 주먹 넣고 죽을 끓여 진승에게 대접했다.
진승은 할머니가 끓여 준 죽을 먹고나서 기운을
차려 다시 싸울수 있게 되었다. 결국 진승은 왕의 자리에 앉게되어 환락을 일삼았으며 산해진미는 물론 사람이 만든 가장
맛있는 안주 요리를 먹으며 즐기고 있었다.
어느 날 홀연히 진승은 황가 모녀가 훤초죽을
끓여 주어서 맛있게 먹은 은혜를 갚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승은 사람을 파견하여 황가 모녀를
궁안으로 모셔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진승은 황가 모녀에게 전에 먹었던 훤초죽을 다시 한 번 더 끓여 달라고
간청했다.
진승은 황가 모녀가 끓인 죽을 먹고 나더니
”맛이 별로군?” “맛이 별로군?” 연거퍼 말했다.
황노파는 웃으며 진승에게
”배가 고프실 때는 망우초가 향기로웠으나 산해진미로 술을 마시게된 지금엔 망우초의 쓴맛 만 느끼실 뿐입니다.”
고 아뢰었다.
황노파의 이 한마디 말로 인하여 진승은 부끄러워
더 이상 황노파를 쳐다 볼수 없었으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하여 진승은 황모녀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황모녀를 궁안에 머물게 하였으며 계속 망우초를 재배하되 망우초를 지금 부터는 황화채라고 개명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는
뜻이다.
진시황(BC 221 년
– BC 210 년)이 죽고나서 제 2 대왕에
이세황제(二世皇帝(胡亥) : BC 209 년 – BC 207
년) 원년(元年) 7월에 진승은 가난한 농부 900
명을 모집하여 진(秦) 나라 정부에 대항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의거(農民義擧)를 기현(蕲縣: 현재 湖北省 蕲春縣)
대택향(大澤鄕)에서 일으켰다.
진승의
자(字)는 섭(涉)이고
양성(陽城: 현재 河南省 登封) 사람이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이다.
진승의 농민군들이 기현과 대택향을 점령했을 당시
병차(兵車)가 6, 7 백대가 있었고
전마(戰馬)는 일 천 여 필(匹)이 있었으며
병사들의 숫자는 수 만명을 헤아렸다.
그리하여 결국 진승은
농민혁명정권(農民革命政權)을 이룩했으며 도성(都城)을 진(陳 :
현재 河南省淮陽)에 정하고 스스로 장초왕(張楚王)이
되었다.
진승의 슬로건은
”금망역사(今亡亦死),
거대계역사(擧大計亦死), 등사(等死),
사국가호(死國可乎)!” 였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오늘 망해도 죽고 큰 성공을 성취하려다가도 죽는다. 죽는 것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 는 뜻이다.
일 개 남의 집 머슴이 왕위에 오른 사람은 중국
역사상 진승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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