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3일 토요일

중국의 선종(禪宗)

중국의 선종(禪宗)

서한(西漢) 11 대왕 애제(哀齊 : BC 6 – BC 1 ) 원수(元壽) 元年(BC 2 )에 불교는 중국에 전입되었다. 동한(東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0 (서기 67 )에 불경(佛經)이 중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부터 불교의 세력은 확고해 지기 시작했고 사원 경제는 보호되었으며 승속세습제도(僧俗世襲制度) 즉 의발(衣鉢) 전수(傳受) 제도가 형성되었다. 각개 종파에는 독특한 종교 이론과 종교 규범과 제도 등이 있었다.

() 나라 말기 부터 당() 나라 중엽(中葉) 까지 중국내에는 사대(四大) 종파인 천태종과 법상종과 화엄종과 선종이 있었다.

다음은 선종(禪宗)에 대한 기록이다.

달마대사(達磨大師)는 선종(禪宗)의 조사(祖師)이다. 그러나 중국의 불교 역사를 관찰해 보면 선종(禪宗)은 그다지 중요한 지위를 점유하지 못했었다. 현재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선종(禪宗)은 선종(禪宗) 6 대 계승자 혜능(惠能 또는 慧能)의 수중에서 형성되었다. () 나라와 당() 나라 때 비로소 불교의 체계는 기본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황제들의 특별한 관심이 있는 종파 만이 흥성 발달되었다. 황제(皇帝)의 상사(賞賜) 아래 사원경제(寺院經濟)는 발달되었으며 일부 소수의 상층 승려들은 세습적 승려 귀족이 되었다. 상층 승려들의 생활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생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불교 교의(敎義) 방면에서도 장황한 문장 해석과 인도의 사변철학(思辨哲學)을 이용한 설명이기 때문에 문장이 매우 어려워 뜻을 알기 어렵고 매우 현묘하여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일부 어려운 불교 교의들은 무시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당(隋唐) 시기에 일부 승려 귀족들은 관부(官府)와 궁정(宮廷) 출입을 하여 사원의 전산(田産)을 확장시키고 노복(奴僕)의 숫자를 증가시키며 불교를 전파하는데 만 급급하였다. 불교의 교의와 계율은 무시하고 불교 선양(宣揚)에 만 힘썼다. 그러다가 당조(唐朝) 중엽 이후 부터 조용조제(租庸調制)가 붕괴되면서 불교 각 종파는 경제면에서 큰 타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혜능(慧能)의 부친의 성()은 노()씨 였고 원적(原籍)은 하북성(河北省) 범양(范陽 : 현재 북경시 서남쪽에 있는 방산현(房山縣))이나 혜능(慧能)은 광동성 남해현(南海縣 : 廣州 남쪽 15km 지점) 태생이다. 혜능(慧能)이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 어머니와 어려운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혜능(慧能)이 산에 올라가서 땔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팔아서 생긴 돈으로 생활을 영위해 갔다. 혜능(慧能)23 세 때 황매현(黃梅縣 : 武漢의 동쪽 165km 지점) 쌍봉산(雙峰山)에 있는 동산사(東山寺)에 올라가 선종 제 5 대 의발 계승자 홍인법사(弘忍法師 :서기 601 서기 674 )를 알현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황매현은 불교 선종의 성지(聖地)이다. 왜냐하면 선종 4 () 도신(道神)과 선종 5 () 홍인(弘忍)과 선종 6 () 혜능(慧能)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그후 부터 혜능(慧能)은 동산사(東山寺) 내의 행각(行脚)이 되어 디딜 방앗간에서 벼를 정미(精米)하는 일을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얼마 후 홍인법사는 자신의 의발을 계승 시킬 사람을 선발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서 홍인법사는 동산사(東山寺)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타(伽陀) 한 구절씩 지어 올리라고 말했다.

가타(伽陀)?

불교의 교리를 찬미하는 글귀를 일컫는데 홍인법사는 각 글귀 마다 각자의 불교 핵심 교의를 포함시켜야 된다고 말했다.

그 당시 동산사 내의 상좌승(上座僧)은 신수(神秀 : 서기 ? – 서기 706 ) 스님이었다. 상좌(上座) 스님이란? 주지(住持) 스님 다음 가는 높은 지위에 있는 스님을 일컫는다. 동산사 스님들은 홍인법사의 후임자로 신수(神秀) 스님이 내정되었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신수 스님은 점오성불(漸悟成佛)의 불교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홍인법사는 신수(神秀) 스님의 가타(伽陀)에 실망하였다.

신수(神秀) 스님의 가타(伽陀)는 다음과 같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시명경대(心是明鏡臺),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물사유진애(勿使有塵埃).”

다시 말하면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으므로 속세의 더러움과 때를 부지런히 털고 닦아야 된다.” 는 뜻이다.

이때 갑자기 디딜 방앗간에서 벼를 정미(精米)하는 행각(行脚) 혜능(慧能)이 홍인법사 앞에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게어(偈語)를 홍인법사에게 올렸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다시 말하면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명경 역시 대()가 아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세속의 때가 묻겠는가?” 라는 뜻이다.

사실 혜능(慧能)은 문자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장일용(張日用)이란 사람이 혜능(慧能)의 생각을 대필해 준 게어(偈語)였다.

홍인법사는 저수일어도파주장돈오적불교교의정수적게어(這首一語道破主張頓悟的佛敎敎義精髓的偈語).” 라고 혜능을 칭찬하였다.

다시 말하면 혜능(慧能)의 게어 한 마디가 돈오적 불교 교의의 정수를 갈파하였다.” 는 뜻이다.

돈오(頓悟)란?

불교의 참뜻을 갑지가(문득) 깨달음을 일컫는다.

혜능(慧能)은 홍인법사의 의발을 비밀리에 받아들고 나서 박해를 받을 것이 두려워 그 날 밤으로 짐을 싸들고 영남 지방으로 도주하였다.

그 당시 어느 불교 종파의 의발 계승자는 그 종파에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재산과 사내(寺內)의 모든 행정적인 업무의 최고 결정자였다. 그래서 의발 계승권 쟁탈전이 승려들 사이에 매우 치열했었으며 잔혹(殘酷)한 수단 까지 사용했었다.

혜능(慧能)은 속세로 돌아가서 16 년 동안 전면목을 숨기고 살았다. 그때 까지도 혜능(慧能)은 수계(受戒)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화상(和尙)은 아니었다.

3 대왕 고종(高宗 : 서기 649 서기 683 ) 의봉(儀鳳) 원년(서기 676 )에 혜능(慧能)은 남해현(南海縣) 법성사(法性寺)에서 인종법사(印宗法師)를 만나 낙발수계(落髮受戒)하였다.

서기 677 년 소주(韶州 : 현재 광동성 韶關)에 있는 조계보림사(曹溪寶林寺)에서 돈오성불(頓悟成佛)의 교의를 전파하였다. 후에 남종 선종은 통치계급의 지지를 얻어 신속하게 발전하였다.

19 대왕 무종(武宗 : 서기 840 서기 846 ) 會昌 5 (서기 845 )에 무종은 멸불정책(滅佛政策)을 폈다. 그리하여 기타 종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오직 남종 선종 만은 계속 발전하였다.

남종(南宗) 선종(禪宗)은 혜능 이후에 남악회양(南岳懷讓 : 서기 677 서기 744 )과 청원행사(靑原行思 : 서기 ? – 서기 740 )의 두 파로 갈라지고 후에 남악회양파는 위앙()과 임제(臨濟) 양 파로 갈라졌다.

또 청원행사파(靑原行思派)는 조동(曹洞)과 운문(雲門)과 법안(法眼)으로 갈라졌다.

이들을 모두 합하여 오가(五家)라고 칭했다.

() 나라 때 까지 오가(五家)는 그대로 존속해 오다가 임제종은 황룡(黃龍)과 양기(楊岐)의 두 파로 또 갈라졌다. 이때 부터 선종종파는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고 칭했다. 남종(南宗) 선종(禪宗)의 경전(經典)은 육조단경(六朝壇經)이라고 부르는데 혜능의 제자들이 혜능(慧能)의 살아 생전의 언행(言行)을 수록한 중국의 유일한 불경(佛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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