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환장(曲煥章)
곡환장(曲煥章 : 서기 1880 년 – 서기 1938 년)의 자(字)는 성제(星際)이고 원명(原名)은 점은(占恩)이다. 근대 중국의 저명한 상과(傷科) 전문 의사였다.
운남성 강천현(江川縣) 사람이다. 곡환장(曲煥章)은 어려서 조실부모(早失父母)하였기 때문에 성인이 될때 까지 할머니와 매형 집에서 자랐다. 곡환장(曲煥章)은 1892 년 12 세 때 매부로 부터 외상과(外傷科)에서 사용하는 약들을 가공하는 기술과 한의학 지식을 습하기 시작하였다. 곡환장의 매부 역시 명의였다.
곡환장(曲煥章)이 치료하는 사람 마다 치료 효과가 신효막측하여 강천현 일대에 그의 명성은 드높아 갔다.
1902 년 곡환장(曲煥章)은 운남성 일대에 있는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직접 채약하고 스스로 임상 실험하였으며 가는 곳 마다 민간 초약의사(草藥醫師)들을 만나고 물어서 기술을 습득하였다. 곡환장(曲煥章)은 각고한 연구 실험 끝에 운남백약의 전신인 백보단(百寶丹)을 창제(創製)하였다.
그후 10여 년 동안 백보단(百寶丹)을 가지고 임상 실험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더욱 발전된 백보단을 만들었다. 백보단(百寶丹)은 도창상(刀槍傷)과 질타손상(跌打損傷)을 비롯한 모든 외상에 신효막측한 효과를 나타냈다. 심지어 인사불성이 된 환자들도 곡환장은 먼저 백보단(百寶丹)을 복용시키고 나서 호력산(虎力散)을 복용시키면 소생하였다. 창상으로 인하여 출혈이 심한 환자들도 소독산과 지혈약을 상구에 발라주면 경한 환자는 2 주면 치유되었고 중한 환자는 한 달 남짓 치료하면 완치되었다.
모든 창(瘡)과 양(瘍 : 종기)과 저(疽 : 악성종기)와 부인과 질병과 소아과 질병에도 백보단(百寶丹)을 위주로 치료하여 탁월한 치유율을 올렸다.
부인과 질병의 치료에는 백보단(百寶丹)을 위주로 하고 보신약주(保身藥酒)와 건혈로약주(乾血勞藥酒)와 홍붕백대산(紅崩白帶散)을 보조제로 사용하여 치료하였으며 소아과 질병의 치료에는 백보단(百寶丹)을 위주로 하고 세장산(洗腸散)을 보조제로 사용하여 치료하였다.
그 당시 도적의 수령으로 이름을 날린 오학현(吳學顯)이 흉부에 창상(槍傷)을 입어 생명이 위독했었는데 곡환장(曲煥章)이 강제로 붙들려 가서 치료하여 완치되었다. 이로인하여 곡씨백약(曲氏白藥)은 온 천하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
1916 년 곡환장(曲煥章)의 운남백약과 호력산(虎力散)과 탱골산(撑骨散)은 정부의 검사 결과 합격품으로 인정받고 공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운남성 최고 군사령관 당계요(唐繼堯)는 곡환장을 동육병원(東陸病院) 주임 의사로 임명하고 교도단(敎導團)의 일 등 군의관으로 임명하였다.
곡환장(曲煥章)은 1917 년 통해(通海 : 昆明 남쪽 110km 지점)에서 행의하였다. 기름 종이에 포장되어 있던 백약을 자개 병 속에 집어넣어 포장하여 전국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1918 년 운남성 당독(唐督)은 도적의 수령 오학현(吳學顯)을 불러 운남성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오학현(吳學顯)은 전에 곡환장(曲煥章)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곡환장(曲煥章)에게 곤명에 의원을 차리도록 허가해 주었다. 그리하여 곡환장(曲煥章)은 곤명시(昆明市) 남강가(南强街)에 외상진료소(外傷診療所)를 설치하였다.
1919 년 오학현(吳學顯)은 군대를 통솔하고 광서(廣西) 지방에서 전투하다가 우퇴골(右腿骨)에 창상을 입고 우퇴골이 골절되었다. 그 당시 곤명에 있던 프랑스 병원과 혜전(惠滇)의원과 육군병원 등을 돌아다니며 치료하였다. 모두 한결 같이 다리를 절단해야 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진단하였다.
그런데 곡환장(曲煥章)이 도맡아서 오학현(吳學顯)의 다리를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오학현(吳學顯)의 우퇴골 골절은 곡환장(曲煥章)의 치료에 의하여 완전히 치유되었다.
서양 의사들은 곡환장(曲煥章)의 치료법에 감탄하였다. 사람들은 곡환장을 “신의(神醫)” 또는 “묘수(妙手)” 등으로 칭했다.
당독(唐督)은 곡환장(曲煥章)의 병원 간판 옆에 “약관남전(藥冠南滇)” 이란 간판을 달아 주었고 오학현은 “효험여신(效驗如神)” 이란 간판을 각각 달아 주었다.
“약관남전(藥冠南滇)” 이란? “운남성 남부에서 제 일의 약방이다.” 는 뜻이고 “효험여신(效驗如神)” 이란? “치료 효과가 신효막측하다.” 는 뜻이다.
1938 년 칠칠사변(七七事變) 후 운남 58 사단과 60 사단이 항일투쟁을 하였다. 곡환장(曲煥章)은 애국심에 불타서 3 만 병의 백보단(百寶丹)을 양군 전체 병사들에게 배부해 주었다. 그 결과 대아장항일전투(大兒庄抗日戰鬪)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같은 해에 국민당 중앙 정부에서는 곡환장(曲煥章)에게 백보단(百寶丹)의 비밀 처방을 내놓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곡환장(曲煥章)은 극구 거절하였다. 그로 인하여 곡환장(曲煥章)은 투옥되었고 감옥 속에서 58 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후 곡환장(曲煥章)의 부인 무난영(繆蘭英) 여사가 곡환장의 뒤를 이어 곡환장대약방(曲煥章大藥房)에서 백보단(百寶丹)을 1949 년 까지 생산하였다. 무난영(繆蘭英) 여사는 1949 년 곡환장대약방(曲煥章大藥房)의 문을 닫고 백보단의 비밀 처방을 중공 인민 정부에 내놓았다. 그때 부터 중국 정부에서는 백보단(百寶丹)을 국가 제일급 한약 보호품으로 정했으며 전칠(田七)과 인삼 외에는 백보단(百寶丹)의 성분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2002 년 부터 운남백약(雲南白藥)은 올림픽 운동 선수들의 창상 전문 치료약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운남백약(雲南白藥)은 뇌중풍 질환과 각종 암병과 신장병 등의 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곡환장(曲煥章 : 서기 1880 년 – 서기 1938 년)의 자(字)는 성제(星際)이고 원명(原名)은 점은(占恩)이다. 근대 중국의 저명한 상과(傷科) 전문 의사였다.
운남성 강천현(江川縣) 사람이다. 곡환장(曲煥章)은 어려서 조실부모(早失父母)하였기 때문에 성인이 될때 까지 할머니와 매형 집에서 자랐다. 곡환장(曲煥章)은 1892 년 12 세 때 매부로 부터 외상과(外傷科)에서 사용하는 약들을 가공하는 기술과 한의학 지식을 습하기 시작하였다. 곡환장의 매부 역시 명의였다.
곡환장(曲煥章)이 치료하는 사람 마다 치료 효과가 신효막측하여 강천현 일대에 그의 명성은 드높아 갔다.
1902 년 곡환장(曲煥章)은 운남성 일대에 있는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직접 채약하고 스스로 임상 실험하였으며 가는 곳 마다 민간 초약의사(草藥醫師)들을 만나고 물어서 기술을 습득하였다. 곡환장(曲煥章)은 각고한 연구 실험 끝에 운남백약의 전신인 백보단(百寶丹)을 창제(創製)하였다.
그후 10여 년 동안 백보단(百寶丹)을 가지고 임상 실험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더욱 발전된 백보단을 만들었다. 백보단(百寶丹)은 도창상(刀槍傷)과 질타손상(跌打損傷)을 비롯한 모든 외상에 신효막측한 효과를 나타냈다. 심지어 인사불성이 된 환자들도 곡환장은 먼저 백보단(百寶丹)을 복용시키고 나서 호력산(虎力散)을 복용시키면 소생하였다. 창상으로 인하여 출혈이 심한 환자들도 소독산과 지혈약을 상구에 발라주면 경한 환자는 2 주면 치유되었고 중한 환자는 한 달 남짓 치료하면 완치되었다.
모든 창(瘡)과 양(瘍 : 종기)과 저(疽 : 악성종기)와 부인과 질병과 소아과 질병에도 백보단(百寶丹)을 위주로 치료하여 탁월한 치유율을 올렸다.
부인과 질병의 치료에는 백보단(百寶丹)을 위주로 하고 보신약주(保身藥酒)와 건혈로약주(乾血勞藥酒)와 홍붕백대산(紅崩白帶散)을 보조제로 사용하여 치료하였으며 소아과 질병의 치료에는 백보단(百寶丹)을 위주로 하고 세장산(洗腸散)을 보조제로 사용하여 치료하였다.
그 당시 도적의 수령으로 이름을 날린 오학현(吳學顯)이 흉부에 창상(槍傷)을 입어 생명이 위독했었는데 곡환장(曲煥章)이 강제로 붙들려 가서 치료하여 완치되었다. 이로인하여 곡씨백약(曲氏白藥)은 온 천하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
1916 년 곡환장(曲煥章)의 운남백약과 호력산(虎力散)과 탱골산(撑骨散)은 정부의 검사 결과 합격품으로 인정받고 공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운남성 최고 군사령관 당계요(唐繼堯)는 곡환장을 동육병원(東陸病院) 주임 의사로 임명하고 교도단(敎導團)의 일 등 군의관으로 임명하였다.
곡환장(曲煥章)은 1917 년 통해(通海 : 昆明 남쪽 110km 지점)에서 행의하였다. 기름 종이에 포장되어 있던 백약을 자개 병 속에 집어넣어 포장하여 전국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1918 년 운남성 당독(唐督)은 도적의 수령 오학현(吳學顯)을 불러 운남성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오학현(吳學顯)은 전에 곡환장(曲煥章)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곡환장(曲煥章)에게 곤명에 의원을 차리도록 허가해 주었다. 그리하여 곡환장(曲煥章)은 곤명시(昆明市) 남강가(南强街)에 외상진료소(外傷診療所)를 설치하였다.
1919 년 오학현(吳學顯)은 군대를 통솔하고 광서(廣西) 지방에서 전투하다가 우퇴골(右腿骨)에 창상을 입고 우퇴골이 골절되었다. 그 당시 곤명에 있던 프랑스 병원과 혜전(惠滇)의원과 육군병원 등을 돌아다니며 치료하였다. 모두 한결 같이 다리를 절단해야 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진단하였다.
그런데 곡환장(曲煥章)이 도맡아서 오학현(吳學顯)의 다리를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오학현(吳學顯)의 우퇴골 골절은 곡환장(曲煥章)의 치료에 의하여 완전히 치유되었다.
서양 의사들은 곡환장(曲煥章)의 치료법에 감탄하였다. 사람들은 곡환장을 “신의(神醫)” 또는 “묘수(妙手)” 등으로 칭했다.
당독(唐督)은 곡환장(曲煥章)의 병원 간판 옆에 “약관남전(藥冠南滇)” 이란 간판을 달아 주었고 오학현은 “효험여신(效驗如神)” 이란 간판을 각각 달아 주었다.
“약관남전(藥冠南滇)” 이란? “운남성 남부에서 제 일의 약방이다.” 는 뜻이고 “효험여신(效驗如神)” 이란? “치료 효과가 신효막측하다.” 는 뜻이다.
1938 년 칠칠사변(七七事變) 후 운남 58 사단과 60 사단이 항일투쟁을 하였다. 곡환장(曲煥章)은 애국심에 불타서 3 만 병의 백보단(百寶丹)을 양군 전체 병사들에게 배부해 주었다. 그 결과 대아장항일전투(大兒庄抗日戰鬪)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같은 해에 국민당 중앙 정부에서는 곡환장(曲煥章)에게 백보단(百寶丹)의 비밀 처방을 내놓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곡환장(曲煥章)은 극구 거절하였다. 그로 인하여 곡환장(曲煥章)은 투옥되었고 감옥 속에서 58 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후 곡환장(曲煥章)의 부인 무난영(繆蘭英) 여사가 곡환장의 뒤를 이어 곡환장대약방(曲煥章大藥房)에서 백보단(百寶丹)을 1949 년 까지 생산하였다. 무난영(繆蘭英) 여사는 1949 년 곡환장대약방(曲煥章大藥房)의 문을 닫고 백보단의 비밀 처방을 중공 인민 정부에 내놓았다. 그때 부터 중국 정부에서는 백보단(百寶丹)을 국가 제일급 한약 보호품으로 정했으며 전칠(田七)과 인삼 외에는 백보단(百寶丹)의 성분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2002 년 부터 운남백약(雲南白藥)은 올림픽 운동 선수들의 창상 전문 치료약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운남백약(雲南白藥)은 뇌중풍 질환과 각종 암병과 신장병 등의 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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