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6일 수요일

왕사능(王士能)의 장수비밀(長壽祕密) :

왕사능(王士能)의 장수비밀(長壽祕密) :
명(明) 나라 때 왕사능(王士能)이란 장수인이 있었다.  왕사능(王士能)은 해주인(海州人)이며 원조(元朝) 지정(至正) 24년(서기1364년)에 출생하여 명조(明朝) 성화(成化) 계묘년(癸卯年 : 서기1483年)에 사망하였으므로 120세(歲)를 누렸다고 《경이편(庚巳編)》에 기재(記載)되어 있다. 명(明) 나라 헌종(憲宗)은 왕사능의 양생지도(養生之道)에 관하여 질문하기 위하여 왕사능에게 입궁(入宮)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왕사능(王士能)은 소년시절 부터 양생장생지술(養生長生之術)에 흥취(興趣)를 갖고 집을 떠나 사방팔방으로 명사(名師)를 찾아 돌아다녔다.  어느 해 왕사능(王士能)은 사천성(四川省)에 도달하여 설산(雪山) 위에 신기(神奇)한  노인(老人)이 한 분 살고있다는 소문을 듣고나서 즉시 배방(拜訪)하였다.   노인(老人)은 모포로 만든 옷을 입고 큰 바위 위에 앉아있었다.  노인(老人)의 키는 작은데 면모(面貌)와 오관(五官)과 수족(手足) 등은 모두 어린아이와 같았다.  왕사능(王士能)은 노인을 향하여 경배(敬拜)하였으나 노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왕사능(王士能)은 노인으로 부터 도(道)를 구하고,노인을 정성껏 돌보아 드리기로 작정하였다. 노인(老人)의 의자 옆에는 푸대가 하나가 놓여있었으며 노인은 푸대 속에는 마른 국수와 비슷한 것이 들어있었다.  노인은 때때로 조금씩 꺼내어 먹고 있었으며 1 리터 내지 2 리터의 물  -  산간(山澗)에서 내려오는 천수(泉水) - 를 마시고 있었다.  왕사능(王士能)이 며칠 동안 노인과 함께 머물며 가져온 미곡(米穀)을 모두 다 먹어버렸으므로 할수없어 노인에게 먹을 것을 구했다. 노인(老人)은 푸대 속에서 약간의 먹을 것을 꺼내어 왕사능에게 건네 주었다. 왕사능은 입안에 넣고 씹어보았다.  맛은 쓰고 떫었다.그리하여 삼킬 수 없었다. 그래서 왕사능은 산속을 돌아다니며 야생과일을 따서 먹고 산야채의 잎사귀를 뜯어먹고  뿌리를 캐어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왕사능은 정성을 다하여 노인을 모시고 3년 동안 산속에서 생활하다가 노인과 작별할 결심을 하였다.  노인(老人)은 어느 날 왕사능에게:「可以向你傳道。你終究是要出山的。他日,如果不是根器很好的人,不要輕易傳授。」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네가 산속 생활을 할 수 없어 내곁을 떠나기로 작정했다니 애석하다만 네에게 도(道)를 가르쳐 주겠다. 그러나 만일 근기가 좋지않은 사람들게는 전수하지 말아라.” 는 뜻이다. 노인(老人)은 말을 마치자마자 왕사능에게 수도장생(修道長生)  방법(方法)을 가르쳐 주었다.  왕사능은 노인의 가르침을 받은 후 노인(老人)에게  고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근기(根器)란?,불교(佛敎)의 교의명사(教义名词)인데  선천적으로 불교(佛教)를 접수할 수 있는 가능성(可能性)을 의미한다.  “근(根)” 은 선천적(先天的) 품행(品行)을 비유한 단어이고,“기(器)”는 불교(佛教)를  접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의 품부(禀赋)와 기질(气质)을 의미한다. 그후 세월이 지나 왕사능은 제녕(濟寧)에 도착하였다. 성(城)의  동편에 편벽(偏僻)한 산속에 거주하며 생식을 하고  하루에 몇 개의 대추와 몇 뿌리의 청채(青菜)와  물을 마시며 생활하였다.  이때 왕사능(王士能)의 머리카락은 온통 백발(白髮)이었다. 그러나 근육과 피부는 세밀하였고 동자(童子)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왕사능은 보통 사람과 다름을 깨달았다.  그 당시 제녕(濟寧)의 지휘사(指揮使) 왕선(王宣)은  해주인(海州人)인데 기특(奇特)한  동향노인(同鄉老人)이 성동(城東)에 거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배견(拜見)하였다. 왕선(王宣)은 노인의 이름이 왕사능임을 알고나서 대경실색하며:「我聽祖上說,我有一位叔祖,叔祖意思是父亲的叔父,也称为叔祖父名為王士能,從小好道出家,誰都不知道他去了哪兒,該不會就是您吧?」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나의 조상들로 부터 왕사능이라고 불리는 나의 숙조부께서 소년시절에 도(道)를 구하기 위하여 출가했는데 집안식구들 중 아무도 왕사능이 어디서 살고있는지 모르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당신이 바로 왕사능 할아버지라니?” 란 뜻이다.  왕선은 왕사능에게 기억나는 대로 옛날일을 묻고 답하는 동안 모든것이 일치함을 알았다. 그후부터 왕선(王宣)은 매일 왕사능을 배알하였다.  성내(城內)의 백성(百姓)들이 이 소문을 듣고나서 서로 앞을 다투어 예물(禮物)을 챙겨들고,왕사능(王士能)을 배알하였으나 왕사능은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 날 왕선(王宣)은 일개(一個)  관원(官員)을  데리고 왕사능(王士能)을 접견시켰다.  관원(官員)은 왕사능 도인으로 부터 도술(道術)의  가르침을 받기 원한다고 간청했다. 왕사능(王士能)은 관원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더니:「你沉湎聲色,每天都做荒唐事,可不是我徒弟啊!」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성색(聲色)을 버리지 못할 불량한 생활습관이 있으므로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는 뜻이다. 관원(官員)은 수치스러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갔다. 후에 이 관원(官員)은 왕사능(王士能)을 천거(薦舉)한다는 글을 써서 조정(朝廷)에  주소(奏疏)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즉시 산동관원(山東官員)에게 명령을 내려 마차(馬車)를 왕사능에게 보내어 진경(進京)시켜 입궁하라고 하명하였다. 그 당시 명(明) 나라 헌종(憲宗)은 왕사능에게 예의를 갖추어 중상(重賞)을 하사하였다. 왕사능(王士能)은 심산에 거주하며 매일 장시간(長時間) 폐목영양신(閉目養神), 유연정좌(悠然靜坐)하며 명상하였다. 매일 수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는데 왕사능은 방문객들에게 가장 많이 해주는 말은 “폐목정좌(閉目靜坐)와 청심과욕(清心寡慾)" 이다. 다시 말하면 ”매일 두 눈을 감고 정좌하여 묵상하고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 는 뜻이다.
병오년(丙午年: 서기1486년)에 양남봉(楊南峰) 선생(先生)은 공무(公務)가 있어 제녕(濟寧)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왕사능(王士能)을 배방하였다,왕사능은 백색(白色) 선의(禪衣)를 걸치고 목탑(木榻)  위에 단좌해 있었다. 목탑이란? 좁고 길며 비교적 낮은 침대인데 평상(平床)이라고도 칭한다. 이때 왕사능(王士能)은 123세(歲)임에도 불구하고 40, 50세(歲)로 보였다. 양남봉(楊南峰)은 노인을 향하여 장수지도(長壽之道)를 가라쳐 달라도 청원하였다.  왕사능(王士能)은:「並沒有什麼特別的方法,惟有不茹葷、不娶妻、不算計、不爭鬥生氣而已。」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특별한 방법은 없으며 고기를 먹지말고 부인을 취하지 말며 계산을 하지말고 싸우지 말며 화를 내지 않는것이다.“ 는 뜻이다.  양남봉(楊南峰)은 노인의 말을 듣고나서 감개탄식(感慨嘆息)하며 노인에게 고별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참고문헌 : 《경이편(庚巳編)》 과 《도공담찬(都公譚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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