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4일 금요일

왕사웅(王士雄)

왕사웅(王士雄)



왕사웅(王士雄)의 자(字)는 맹영(孟英)이고 또 다른 자(字)는 몽은(夢隱)이며 호(號)는 잠재(潛齋)이고 별호(別號)는 반치산인(半痴山人)이며 왕맹영의 서방(書房)의 제호(題號)는 잠재(潛齋)이다.



청(淸) 나라 제 7 대왕 인종(仁宗) 가경(嘉慶) 13 년(서기 1808 년)에 현재 절강성 해녕(海寧)에서 태어났다. 원래 왕맹영의 조상들의 고향은 안화(安化 : 현재 감숙성 慶陽縣)이다. 후에 조상들은 절강염관(浙江鹽官 : 현재 海寧市)로 이사했고 건륭 년간에 증조부 왕학권(王學權)께서 전당(錢塘 : 현재 杭州)으로 이주하였다.



왕맹영의 증조부 왕학권은 의학에 정통한 명의이며 의학수필(醫學隨筆)을 저술하였다. 조부의 이름은 왕영가(王永嘉)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왕?창(王?滄)인데 모두 의학에 정통한 명의들이었다.



왕사웅은 엽천사(葉天士)와 설생백(薛生白)과 오국통(吳鞠通)과 더불어 청대사대온병학가(淸代四大溫病學家) 중 한 사람이다.



사웅이 열 두살 되던 해 아버지가 온병(溫病)에 걸려 병정이 매우 엄중하였다. 여러 명의들을 불러 치료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린 사웅은 의사들이 아버지를 진맥하고 치료하는 광경을 유심히 목격하였다. 사웅이 열 네살 때 아버지는 별세하였다. 그후 왕사웅(王士雄)의 가정은 경제적인 타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극빈한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임종시 어린 사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인생재세계상(人生在世界上), 필수대사회유소공헌(必須對社會有所貢獻), 재불고부자기적일생(才不辜負自己的一生),

이여과능구체회저일점(爾如果能够體會這一點), 아수사야몰유유감료(我雖死也沒有遺憾了).”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한 평생 사는 동안 반드시 사회에 공헌을 해야 한다. 자기 일생을 헛되게 저버리면 않된다. 만일 네가 이점을 이해하고 몸소 터득하여 애써 성취한다면 나는 지금 죽더라도 유한(遺恨)이 없다.” 는 뜻이다.



왕사웅(王士雄)은 가훈을 이어받아 열심히 의학에 전념하여 훌륭한 의사가 되어 보겠다고 결심하였다.



왕사웅(王士雄)은 울면서 유계정(兪桂庭) 외삼촌에게 ”선인유훈(先人遺訓), 촉아수대세간유소공헌(囑我須對世間有所貢獻), 아인위재세계상최유공헌적시의생료(我認爲在世界上最有貢獻的是醫生了). 아타산거연구의학(我打算去硏究醫學), 지시가무방면(只是家務方面), 미지가부편로구구지지(未知可否偏勞舅舅支持)?”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저는 세상에 반드시 공헌 할 것입니다. 저는 의사가 세상에 가장 큰 공헌을 할수 있다고 생각되어 열심히 의학을 연마할 계획입니다. 물론 가사를 돌봐야겠지요. 외삼촌께서 저를 도와 주시겠지요?” 라는 뜻이다.



왕사웅(王士雄)의 외삼촌은 쾌히 승락하였으며 왕사웅(王士雄)을 도와 주겠다고 말했으며 열심히 의학 연마에 전념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왕사웅(王士雄)은 자호(自號)를 잠재(潛齋)라고 지었는데 이는 스스로 경각심을 높인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왕사웅(王士雄)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직장을 잡아야 했다. 그해 겨울 부친의 친한 친구 김이사(金履思)의 소개로 무주(婺州 : 현재 浙江省 金華市)에 있는 금화차업좌사(金華鹾業佐司)의 회계를 맡아 보았다. 사웅은 낮에는 직장에 나가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의학 서적을 탐독하였다. 또 회사에서도 근무 시간 외의 여가를 이용하여 틈틈히 책을 읽었다.



여름 밤에 모기장 속에서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의학 서적들을 탐독하여 모기장의 윗부분과 천정에 등잔불에 의한 끄름으로 색깔이 시커멓게 변하여졌다. 이와 같이 열심히 공부한 사웅은 각고근학(刻苦勤學) 끝에 일대(一代) 명의(名醫)가 되었다.



1824 년 여름 사웅이 17 세 되던 해 염업(鹽業)에 종사하는 비대한 27 세의 주광원(周光遠)은 대변을 본 후 갑자기 식은 땀으로 목욕을 했으며 잠시 후 온 몸이 얼음덩이 처럼 차가워 졌다. 입술은 푸르고 하얗게 변했으며 기력이 없었다. 의사들을 불러 치료했다. 의사들은 한결 같이 사증(痧症)이라고 진단했고 방향개규약(芳香開竅藥)을 주광원에게 처방해 주었다.



왕사웅(王士雄)은 스스로 주씨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이 연하고 무력했으며 너무 약하여 맥이 끊어지려고 하였다. 사웅은 주씨의 병증은 사증(痧症)이 아니고 양기욕탈증(陽氣欲脫症)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래서 사웅은 의사들에게 방향발산약물을 복용시킬 경우 주씨의 생명에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의사들은 임상 경험도 부족한 어린것이 무엇을 알겠느냐고 사웅의 말을 일소에 부쳤다. 그러나 주씨는 어린 사웅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판단 한 후 사웅의 말을 받아들이겠다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주씨는 왕사웅(王士雄)이 처방해 준 4 전(錢) 내지 5 전(錢) 쯤 되어 보이는 노강(老薑) 한 덩이를 끓여서 복용했다. 복용 후 즉시 효험이 나타나서 주씨의 병정은 호전되었으며 그후 계속 인삼과 황기와 백출과 감초 등 보약으로 다스려 주씨의 양기편허증(陽氣偏虛症)이 완치되었다.



그후 3 년 동안 수많은 환자들이 사웅의 치료를 받고 효험을 봤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사웅의 의술이 고명하다는 소문이 인근 각지로 널리 퍼져 나갔다. 더욱이 사웅은 가난한 환자들의 질병은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환자를 진료해 주고 남은 시간들은 자신의 임상 경험을 저작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청(淸) 나라 제 8 대왕 선종(宣宗 : 서기 1821 년 – 서기 1850 년) 도광(道光) 17 년(서기 1837 년)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 곽란병이 유행했다. 사망율이 매우 높아 곽란병에 걸린 사람 마다 죽어갔다.



왕사웅(王士雄)은 곽란병 환자들을 치료하여 수 많은 생명을 구해 냈다.



그리고 왕사웅(王士雄)은 자신의 임상 경험을 정리하여 1838 년 (도광 18 년)에 곽란론(霍亂論)을 펴냈다. 왕사웅(王士雄)의 곽란론은 고대 부터 전해 내려 오는 곽란의 이론과 자신의 임상 경험을 추가한 것이다.



그후 왕사웅(王士雄)은 더욱 열심히 연구하여 진일보 발전된 왕사웅의 역작(力作) 온열경위(溫熱經緯)를 1852 년에 편찬하였다. 온열경위는 왕사웅 자신의 임상 경험의 기초 위에 ”이헌기중경지문위경(以軒歧仲景之文爲經), 엽설제가지변위위(葉薛諸家之辨爲緯)” 를 편찬의 원칙으로 삼아 저술하였다.



다시 말하면 ”황제와 기백과 장중경의 이론을 경도(經度)로 삼고 엽천사와 설생백을 비롯한 온병학가들의 변증(辨證)을 위도(緯度)로 삼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웠다는 뜻이다.



그후 왕사웅(王士雄)은 수식거음식보(隨息居飮食譜), 왕씨의안, 잠재의화, 잠재간효방, 고금의안안선, 속집사과간효방, 봉와록험방(蓬窩錄驗方), 평주중경당수필(評註重慶堂隨筆), 유주의화(柳州醫話), 사진신원체의화(史缙臣願體醫話), 계명록(鷄鳴錄), 귀연록(歸硯錄), 여과집요(女科輯要) 등을 저술했다.



특히 여과집요(女科輯要)에는 그 당시 영국 의사 벤자민 홉슨(Benjamin Hobson : 서기 1816년 – 서기 1873년)이 중국어로 저술한 전체신론(全體新論)의 인체 해부학과 인체 생리학 이론을 추가하여 저술했다. 이는 한의학 의적 속에 서양 의학의 학설을 추가한 최초의 의서(醫書)이다.



벤자민 홉슨은 영국의 선교사이고 의사이다. 홉슨은 1843 년 광주(廣州)에 혜애병원(惠愛病院)을 설립하고 20 여년 동안 환자들을 치료했으며 1855 년 중국어로 박물신편(博物新編)을 저술하여 서양의 자연과학 지식을 중국 사람들에게 보급시켰다. 또 전체신론을 저술하여 인체 해부학과 인체 생리학의 지식을 중국 의학계에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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