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산(五石散)과 위진(魏晉) 명사(名士)들
일종의 약물이 한 시대를 풍미하던 때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진시황(秦始皇)의 불로장생선단(不老長生仙丹)과 청 나라 후기의 아편과 서진(西晉 : 서기 265 년 – 서기 316 년)의 명사(名士)들이 오석산에 매혹되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있었다.
선단(仙丹)의 기원은 원래 최고 통치자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탈피해 보려는 노력의 결과이었고 아편은 백성들의 생활의 질을 떨어 뜨렸었다. 선단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기 위해서 복용되었고 아편은 육체적인 향락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석산(五石散)이 서진(西晉) 때 환영받았던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노신(魯迅)의 ”위진풍도급약여주적관계(魏晉風度及藥與酒的關係” 에 보면 다음과 같이 오석산(五石散)에 대하여 피력해 놓았다.
”오석산시일종독약(五石散是一種毒藥), 시하안흘개두적(是何晏吃開頭的). 한시(漢時), 대가환불감흘(大家還不敢吃), 하안혹자장약방약가개변(何晏或者將藥方略加改變), 변흘개두료(便吃開頭了). 오석산적기본(五石山的基本), 대개시오양약(大槪是五樣藥); 석종유(石鐘乳), 석유황(石硫黃), 백석영(白石英), 자석영(紫石英), 적석지(赤石脂); 령외파환배점별양적약(另外怕還配點別樣的藥).”
다시 말하면 ”오석산(五石散)은 독약이다. 하안이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한(漢) 나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 까지도 감히 오석산을 복용하지 못했었다. 하안과 다른 사람이 오석산(五石散)의 약방을 개량하여 처음 복용하였다. 오석산(五石散)은 종유석과 석유황과 백석영과 자석영과 적석지 등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하안은 아마도 그외 몇가지의 다른 약도 가미했을 것이다." 는 뜻이다.
오석산(五石散)을 복용하면 맨 처음 신체가 차디 찼다가 열이 나기 시작한다. 학질에 걸린 사람과 비슷하며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없고 사방으로 돌아 다녀야 한다. 또 찬 음료를 계속 마셔야 하고 찬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오석산(五石散)의 약력이 발산된다. 그래서 오석산(五石散)은 "행산(行散)" 이란 이름을 얻었다.
오석산 복용 후 밖앝을 돌아다니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 같은 걱정이 생긴다. 동시에 장기간 오석산을 복용할 경우 피부가 민감해 짐은 물론 피부가 달아서 헤지기 쉽다. 그래서 서진(西晉)의 명사(名士)들이 크고 헐렁 헐렁한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 했으며 얼핏 보기에 둥둥 떠다니는 것 처럼 보였다.
다음과 같은 노신(魯迅)의 글에서 더욱 자세한 오석산의 일면목을 엿볼 수 있다.
”흘오석산지후(吃五石散之後), 인피부이어마파(因皮膚易於磨破), 천혜야불방편(穿鞋也不方便), 고불천혜말이천극(故不穿鞋袜而穿屐),소이아문간진인적화상혹나시적문장(所以我們看晉人的畵像或那時的文章), 견타의복관대(見他衣服寬大), 불혜이극(不鞋而屐),이위타일정시흔서복(以爲他一定是很舒服), 흔표일적료(很飄逸的了), 기실타심리도시흔고적(其實他心理都是很苦的).”
다시 말하면 ”오석산(五石散) 복용 후 피부가 쉽게 망가지기 때문에 신발을 신으면 대단히 불편했다. 그래서 신발도 신지 못하고 양말도 갑갑해서 신지 못했으며 더욱이 나막신은 신을 수 없었다. 진(晉) 나라 때 그린 그림들을 보면 더욱 자세히 볼수 있고 진 나라 때 글을 읽어 보면 잘 알수 있다. 크고 헐렁 거리는 의복을 입고 맨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훨씬 편하나 한편으로는 고통 스럽다.” 는 뜻이다.
의복이 크고 헐렁거리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새 의복이냐? 헌 의복이냐? 가 더욱 중요했다. 새 의복은 부자연스럽고 거북스러웠기 때문에 새 의복은 싫어했고 환영을 받지 못했다.
또 의복을 세탁해서 입는 것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세탁하지 않은 헌 의복이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 나라 때 오석산(五石散)을 복용하는 명사들은 지저분하고 칠칠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오석산(五石散)을 복용하는 명사들의 의복과 신체가 불결하니 명사들의 몸은 이(蝨)들의 낙원(樂園)이었다.
이(蝨)를 잡으며 태연하게 아무 꺼리낌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은 진 나라 때 오석산(五石散)을 복용 명사들의 모습의 일부분이었다.
진 나라 때 명의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 보면 오석산(五石散) 복용 후 자기 자신이 겪은 오석산(五石散)의 약성과 고통을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다.
”흘오석산지후(吃五石散之後), 혼신조열(渾身燥熱), 오내여분(五內如焚), 재융동계절(在隆冬季節), 광착신자흘빙(光着身子吃氷), 하천취경가난이인수(夏天就更加難以忍受),상득료학질상한일양(象得了疟疾傷寒一樣),신체부종(身體浮腫), 사지산통(四肢酸痛), 지능방성애호(只能放聲哀號).”
다시 말하면 ”오석산(五石散) 복용 후 온 몸에서 조열이 나고 오장(五臟)에 불이 붙어 타고 있는 느낌이 들며 엄동설한에도 옷을 발가벗고 지내야 됨은 물론 얼음 물을 계속 마셔야했다. 여름철엔 더욱 견디기 힘들었고 학질에 걸린 사람과 똑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온 몸이 붓고 사지산통이 생기며 때로는 슬피 통곡도하고 울부짖기도 한다.” 는 뜻이다.
황보밀(皇甫謐)은 오석산(五石散)을 복용한 후 고통을 참다 못하여 칼을 들고 자살하려 했으나 황보밀(皇甫謐)의 숙모가 사정하며 말리는 바람에 자살을 포기하였다.
황보밀(皇甫謐)은 또 오석산(五石散)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허다인발산실오(許多人發散失誤), 사어비명(死於비명). 아적족제(我的族弟), 통고득설두도함입후롱지중(痛苦得舌頭都陷入喉咙之中). 동해인왕양부(東海人王良夫), 옹심심함입후배(癰深深陷入後背), 롱서신창서(陇西辛昌緖), 척육완전궤란(脊肉完全潰爛), 촉군적조공열(蜀郡的趙公烈), 중표친척리유육인인차이사(中表親戚里有六人因此而死). 저도시복용한식산조성적(這都是服用寒食散造成的), 아수연환활착(我雖然還活着), 단야시구연잔천(但也是苟延殘喘), 유인소병(遺人笑柄).”
다시 말하면 ”수 많은 사람들이 실수로 생명을 잃었다. 나의 집안 동생들은 오석산(五石散) 복용 후 혀가 꼬부라져 안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막아 숨을 제대로 쉴수 없었으며 동해(東海)에 사는 왕양부(王良夫)란 사람은 오석산(五石散)을 복용하고 나서 악창이 등에 생겨 깊이 살을 파고 들어가 푹 꺼져 있었고 롱서(陇西)에 거주하는 신창서(辛昌緖)는 오석산(五石散) 복용 후 등심살이 모두 썩어 문드러졌으며 촉군(蜀郡)에 사는 조공열(趙公烈)의 내종과 이종과 외종 형제들은 오석산(五石散) 복용 후 6 명이 죽고 말았다. 모두 한식산을 복용한 때문이다. 나는 숙모 덕분에 겨우 생명을 건져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부지해 나가지만 한낱 웃음거리로 남아있다.” 는 뜻이다.
오석산(五石散) 복용 후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데 어찌하여 진(晉) 나라 때의 명사(名士)들에게 오석산(五石散)의 인기가 떨어지지 않했을까? 또 어째서 오석산(五石散)을 앞을 다투어가며 복용했을까?
단 한 가지 이유는 장양(壯陽)해 보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진 나라 때 얼굴이 희고 팽팽한 얼굴을 지닌 남자들과 심성이 온순하고 부드럽고 성격과 행동이 얌전한 남성들이 여성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었다. 요즘 처럼 남성들이 튼튼한 근육을 갖고 있는 남성들은 여성들로 부터 호평을 받지 못했었다. 오석산(五石散) 만이 이상에 열거한 남성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는 약이었다. 즉 오석산(五石散)은 남성들의 장양과 미모를 모두 만족시켜주는 약이었다.
남북조시대 유송(劉宋)의 태의령(太醫令) 진승조(秦承祖)는 ”오석산시제박지영화(五石散是制作之英華), 군방지영수(群方之領袖)”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오석산(五石散)은 훌륭하게 만들어 졌고 모든 약 처방 중 으뜸간다.” 는 뜻이다.
서진(西晉)의 저명한 의학가 송상심(宋尙甚)은 ”지단언설오석산보치백병(至斷言說五石山保治百病), 실재시선단일양적동서(實在是仙丹一樣的東西).”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오석산은 백 가지 병을 치료해 주고 실제로 선단과 같은 약이다.” 는 뜻이다.
오석산 중 주요 원료의 약효는 다음과 같다.
석유종 : 온폐기(溫肺氣), 장원양(壯元陽), 하유즙(下乳汁). 주치 : 허로로 인한 천해, 양위(陽痿), 요슬산통, 유즙불통
백석영 : 온폐신(溫肺腎), 안심신(安心神), 이소변. 주치 : 폐한으로 인한 해천(咳喘), 양위(陽痿), 경계, 기억력 감퇴, 소변불리.
석유황 : 장양살충 주치 : 양위(陽痿), 허한으로 인한 설사, 변비.
적석지 : 삽장(澁腸), 지혈(止血), 생기(生肌), 염창(敛瘡) 주치 : 유정(遺精), 구사(久瀉), 탈항, 붕루, 대하, 궤양.
자석영 : 진심(鎭心), 안신(安神), 강역기(降逆氣), 난자궁(暖子宮). 주치 : 허로로 인한 경계(驚悸), 해역(咳逆), 불잉(不孕), 부녀혈해허한(婦女血海虛寒).
이상 5 가지 약물 중에서 자석영 만 여성들의 자궁을 따뜻하게 해주고 나머지 4 가지 약물들은 한결같이 양기를 북돋아 주는 장양약(壯陽藥)들이다. 위진의 명사들이 오석산을 복용한 목적이 폭로된 셈이다.
오석산(五石散) 복용 후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주지만 사람을 황홀경과 무아경으로 진입시켜 주고 속세의 번뇌와 실망 등을 없애주며 하늘 끝 저멀리 둥둥 떠다니는 기분을 만들어 주고 일종의 탈속적(脫俗的) 감각을 일으키게 해주는 점은 오석산(五石散)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진(魏晉) 때 명사(名士)들이 복용한 오석산(五石散)은 일종의 정신아편이었다.